(시사1 = 김재필 기자)연일 이어지는 폭염에도 참새목 휘파람새과에 속하는 '개개비'가 경남 주남지 연꽃단지에서 "한 여름 아침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시사1 = 김재필 기자) 강화도엔 갯벌과 철새, 돈대와 유서 깊은 사찰, 근대적 교회 건물등 자연과 인공적인 볼 거리들이 많아 나는 자주 강화를 찾는다. 올해에도 유례없는 역병(코로나19)을 피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염을 이고 나문재나물이 붉은 양탄자처럼 깔린 석모도 갯벌을 지나 보문사를 찾았다. 강화도에서 유일한 커다란 마애불은 만나기 위함이었다. 동해의 양양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관음도량으로 알려진 서해에 있는 ‘보문사 마애석불좌상’은 강화군 석모도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 이름을 딴 낙가산(해발 235m)에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635년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 이곳에 와 창건했다는 보문사의 극락보전 우측 419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눈썹바위가 나를 압도 한다. 마애불은 이 눈썹바위에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 주지인 이화응 스님이 마애불 밑그림을 그리고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의 주도하에 후원금과 불자들의 보시로 높이 9.2m 너비 3.3m 의 좌불상으로 조성 되었다. 연꽃대좌에 앉아 있는 불상은 중앙에 아미타불이 조각된 보관을 쓴 모습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 하였으며 백호가 박힌 이마, 갓 시집
(시사1 = 김재필 기자) 우리나라의 마애상(磨崖像)은 대부분이 부처나 보살을 주 대상으로 조성됐다. 과천 정부종합청사내 기술표준원 옆의 작은 길로 진입하면 250여m 거리에 등산로를 가운데로 양옆으로 두 개의 바위 중 높이 1.8m, 폭 2m 정도 되는 왼쪽 바위에 5명의 스님얼굴(僧容)만을 입체감 있게 조각되어 1,000년동안 길가는 사람들을 웃음으로 맞이 해 주는 마애상이 있다. 바위 상단에 정면으로 2명 측면으로 1명, 하단에 정면과 측면으로 각각 1명씩인데 투박하고 서투른 솜씨지만 모두 익살스럽고 잔잔한 미소를 띤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헌데 무슨 사유로 부처나 보살이 아닌 스님들의 얼굴만 한 곳에 새겼을까? 안내판에 따르면 명칭이 “용운암마애승용군” 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없어진 옛 암자인 용운암의 스님들이 행사를 마치고 어느 스님의 제안으로 5명이 한자리에 모인 걸 기념하기 위해, 아니면 암자가 없어지는 아쉬움에 요즘 유행하는 인증샷 찍듯 바위에 얼굴을 새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 본 나는 깜짝 놀랄만한 걸 발견했다. 4명의 얼굴은 모두 코가 크고 머리가 덥수룩하여 서양인처럼 보이고 다른 1명은 여자얼굴로 보였다.
(시사1 = 김재필 기자) 저어라~ 그러면 잡힐 것이다. 주걱처럼 생긴 부리로 개천이나 바다의 얕은 물속을 휘휘 저어서 먹이(물고기나 게등)를 잡아 먹는 다해서 ‘저어새’라 불리는 천연기념물205호로 지정된(1968.5.31.) 일급 멸종위기 귀한 철새가 폭염이 이어지는 7월초에 강화도 창후항에서 카메라에 포착 되었다.
(시사1 = 김재필 기자) -고려가 자주국임을 천명했던 고려황제의 만세를 염원한 마애불 - 코로나19가 좀 뜸해진 여름초입에 올림픽대교를 건너 하남방향으로 30여분 달려 네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하남시 교산동에 위치한 선법사를 찾았다. 절집 마당에 들어서니 오른쪽 앞쪽에 백제의 온조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깃든 작은 샘인 ‘온조왕 어용샘’과 작은 폭포 옆에 위치한 2m 정도 크기의 편마암인 삼각형 바위에 선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조각 작품인 ‘마애약사여래좌상’이 단아하면서 절제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앞면을 자세히 보니 다른 마애불에서 보지 못했던 점점이 정으로 쪼은 작은 점들이 보인다. 그렇다! 1884년 5월에 점묘법을 처음 작업에 도입하여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을 그려 화제를 불려 모았던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의 점묘법보다 무려 1,000여년이 앞선 기법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선조들의 예술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로 51 cm 세로 94 cm 크기의 약사여래좌상은 특이하게도 복판의 앙련좌를 이중의 대석을 이중으로 새겨 넣고, 중대에는 4개의 모서리 기둥이 받치고 있는
(시사1 = 김재필 기자)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궁궐지기는 장마철에 어떤 복장을 했을까? 당시 군사들의 우장(雨裝)은 처네형과 방령형 2겹의 '유삼'과 '지삿갓' '갈모' 2종의 모자를 썻는데 수문장은 2종의 유삼을 입고 지삿갓을 썻으며, 수문군은 처네형 유삼과 갈모를 쓴 우장(雨裝)을 갖추고 경비를 섰다.
(시사1 = 김재필 기자)석모도 갯벌에는 요즘 붉은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나문재나물이 갯벌을 수놓고 있다.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나물이 자라는데 사람들은 그 나물을 경징이풀이라고 불렀다. .(연려실기술(인조조도고사본말)> 이는 병자호란시 한성판윤 김경징이 김포에서 가족 친지만 배에 태워 피난시키고, 피하지 못한 백성들은 청나라 병사들에게 도륙되어 그 피가 강화 해변에 흘러들어 나문재나물을 불게 물들였다고 하여 강화도에선 나문재나물을 “경징이풀”이라고 불렀다.는 슬픈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에 영화 <병자호란>을 떠 올리며 숙연해진 마음으로 셔터를 누루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사1 = 김재필 기자) 신작전의 정기회원전이 6월 23일부터 29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정기회원전에는 무엇보다도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관록있는 작가들의 대거 참여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중에서도 김봉주 작가는 ‘마릴린 먼로’라는 문화 아이콘의 대중적 이미지를 차용하여 그 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이 시대와 소통하고 하고 있다. 특히 ‘먼로 시리즈는 피상적으로 표현되는 단순하고 사실적이며 대중적인 이미지만을 주제로하지 않고 대중적 요소와 Pop Art와 차별된 새로운 회화적 표현을 시도하는 작가의 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석 자신의 화법으로 재창조(강수경 평론가)하는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백순임 작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불안정) 사이에서 많은 괴리감과 허무를 느끼고 있다. 이걸 극복하고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명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제 작품이 그림과 명상의 경계가 사라진 사례를 보여주고 또한 그림으로 인해 명상의 고요와 그 투명한 빛을 띤 것을 체감할 수 있게 해 주는 가교가 되길 바란다.”는 명상화가 백순임 작가. “명상은 제 작품 활동의 두드러진 콘셉트이자 그림을 통해
(시사1 = 김재필 기자)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하략- 신경림 시 ‘주천강가의 마애불’중에서 우리나라의 무릉도원이라고 부르는 영월 무릉도원면 주천강가에 요선암이 있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요선암(邀仙巖)위에 물방울 모양의 큰 바위에서 밤마다 부처가 나와 주천강가에서 산책을 하곤 사바세계를 둘러보고 새벽이면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고 신경림 시인은 말한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제로는 그의 작품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각 작품은 내가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대리석 안에 만들어져 있다. 나는 다만 그 주변의 돌을 제거할 뿐이다.“ 불심이 깊었던 고려시대의 한 석공도 바위에서 부처를 보았을 터이고, 망치와 끌로 바위 속에서 3.5m의 큰 부처를 드러내어 모셨던 것이리라.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만 있던 부처는 모두들 잠든 밤에 힘들게 바위에서 빠져 나와 주천강에 발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낮에 씨끌벅적 했던 주천장터에서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의 온기도 느껴보고 , 마을의 어느 집에서 나오는 숨가쁘게 사랑하
(시사1 = 김재필 기자) 용과 봉황이 지켜주는 산자락에서 당신의 따뜻한 미소는 천년하고도 이백년이나 더 지나는 동안 나라가 몇 번이나 바뀌었어도 항상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사바세계의 민초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네. 코로나로 지친 봄이 흐느적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오월말경에 용의 몸통에 봉황의 머리 형상을 한 ‘충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홍성에 있는 용봉산(381m)을 찾았다. 홍성과 예산은 인근의 서산과 태안을 함께 묶어 ‘내포(內浦 바다가 육지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역)지방’이라고 부른다. 경주의 남산이 신라의 불국토였다면 용봉산(381m)은 절터만도 27곳이나 되는 내포의 불국토라 불릴 만하다. 통일신라 전후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백제의 연속된 전란으로 피폐했던 백성들은 하루빨리 미륵이 하강하여 구원해주기를 염원했던 것이리라. 구룡대 매표소에서 표를 사면서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신계리 마애불과 용봉사 마애불을 일컬어 ‘자매마애불’이라고 한다.(나중에 알고 보니 용봉사에서 15분정도 더 올라 가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구의 신경리마애불이 있었다) 표를 사 들고 용봉사 일주문을 통과하니 왼쪽으로 큰 바위가 보인다. 용봉사 마애불이 조성된 바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