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1 = 김재필 기자)겨울의 진객 두루미를 탐사하기 위해서 서해안과 서울에 눈이 왔던 지난 19일에 강화의 동검도를 찾았다. 두루미는 인천광역시에서 1980년 초반에 시조(市鳥)로 지정될 정도로 예전엔 인천 서구 경서동과 연희동 갯벌에 제법 많이 찾아들었습니다. . 따라서 인천의 지명중에 두루미의 한자 이름인 학((중국에선 학.鶴, 일본에선 단정학.丹頂鶴)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송학동' '선학동' '문학동' '선학동' '학익동' 등 동네이름과 '문학산' '승학산'등 산의 지명이 두루미와 관련이 있다 하겠다. 허나 그 갯벌(경서동, 연희동 주변)들이 대규모로 매립 되고 간척사업등으로 두루미는 찾아 들 곳을 잃어 한동안 뜸하다가 2000대년초부터 강화 동검도 주변 갯벌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검도의 연륙교가 놓아지면서 잠시 주춤했던 갯체수가 연륙교를 해수가 통과할 수 있도록 개선한 후 다시 조금씩 생태가 복원되기시작하면서 최근엔 30여마리까지 관찰 되고 있다. 강화의 두루미들은 밀물과 썰물을 잘 이용해 갯지렁이나 작은털통게등을 잡아 먹기 때문에 철원의 채식주의자(낙곡을 주로 먹음)에 비해 육식주의자라 할 수 있다.
(시사1 = 김재필 기자) 경기도 안양시의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 (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년)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 예술공원 근처에 (만안구 석수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安養寺. 지금은 폐사됨)를 창건하게 되었다. 불교에서의 안양(安養)은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청정한 국토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있는데, 괴로움이 없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다는 곳으로 불자들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서방정토로 곧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안양시에 사는 시민들은 극락생활 누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예술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 위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마애종(磨崖鐘),암벽에 새겨진 대부분의 마애상들은 부처를 조각한 마애불(磨崖佛)인데 이곳 마애종은 스님이 당
(시사1 = 김재필 기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아파트 단지내에서 볼 수 있는 마애불(서울시 성동구 향토유적 제 2호)이 있다. 서울 왕십리 KCC스위첸 아파트내에 조성된 아담한 공원엔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이 있는데 그 바위에 작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아기동자를 새긴 마애불이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상왕십리에서 하차하여 KCC 스위첸 아파트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인 아파트 앞에서 내려 경비실( 마애불 볼러 왔다 하면 통과 시켜준다)을 통과해 101동 왼쪽으로 돌아 올라 가면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마애불을 보존키 위해 아파트이 마련 했나 보다. 이 곳은 원래 안정사라는 절이 있었던 자리였다. 안정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고찰로써 조선시대 무학대사(1327∼1405)가 이 사찰을 중건하고 7일간 기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접하고 경복궁 터를 정했다는 전설과 함께 어느 날 꿈에 앞마당을 발로 디뎠더니, 그곳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눈을 뜬 무학대사는 ‘푸를 청(靑)’에 연꽃 ‘연(蓮)’자를 써서 안정사를 ‘청련사’로 개명을 했다 하는 사찰 개명의 전설이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정한 한양의 네 비보사찰은 동
(시사1=김재필 기자)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 영주는 소백산 자락에 터를 잡고 신라시대 경주 다음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제2의 불국토가 아닌가 생각 될 정도로 봉우리들의 이름이 비로봉, 연화봉, 국망봉등이 있으며, 문수리라는 지명등에서 보듯 불교와 밀접한 삶과 불교 유적이 많은 지역이다. 봉화 북지리 마애불 탐사를 마치고 영주에 들어섰을 때는 단풍이 쇠락해지는 늦가을의 오후 햇살이 잔잔하게 서천(영주를 남북으로 가로 지른 川)에 내리 앉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애불들이 높은 산이나 호젓한 마을 뒷산에 위치 해 있듯 가흥동의 삼존불도 내성천의 지류인 서천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돌아 흐르는 지점의 남동쪽으로 향한 야트막한 언덕에서 예천쪽으로 나가는 28번 국도를 달리는 차들과 서천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주위의 옛 지역명은 ‘한절마(大寺洞)이다. 이름에서 유추 해 보건데 지금은 관공서 및 아파트등이 들어선 시가지가 됐지만 마애불이 조성 됐던 신라시대엔 큰 절이 있었던 지역으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위에서 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탑이나 기왓장들이 발견됐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이층으로 쌓여진 삼각형으로 된 화강암의 제일 상층에 뒷면 암석과 틈이 벌어진
(시사1 = 김재필 기자) 지인의 전시가 대구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축하도 할겸 동대구행 KTX를 탔다 그러나 나의 또다른 목표는 구름 위에 앉아 있다는 동화사 마애불을 만나는 것이었다.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혼자였는데 오늘은 대구에 사는 화가와 경주에서 달려 온 사진가와 함께 하여 호강 하는 여정이 되었다. 동화사는 서기 93년(신라 소지왕 15년) 극달(極達)이 세운 유가사(瑜伽寺)를 832년(흥덕왕 7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重建)한 사찰로 이때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 동화사(桐華寺)라 개칭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사찰은 원효와 의상이 수도하였던 곳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를 그어놓은 봉우리마다 부처의 대자대비한 법음이 대장경처럼 펼쳐져 있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합창되어 들려오는 푸른 계곡마다 옛 신라의 화랑정신과 삼국통일의 정기가 서려 있는 신라의 작은 불국토라 할 수 있는 높이 1,100여미터의 팔공산에 봉황의 기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화사엔 두 곳의 입구가 있다. 동화문과 봉황문이다. 전에 촬영차 몇 번 왔을 때마다 동화문을 거쳐 들어 갔는데 이번엔 동화문 안내자가 마애불은 봉황문쪽이라고 알려준다. 봉황문 매표소를 지나 주차
(시사1 = 김재필 기자) 경주 남산의 7대보물은 ‘삼릉계곡 석불좌상’, ‘마애관음보살상’,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칠불암 마애불상군’ ‘삼릉계곡 선각마애육존불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등이다. 경주 남산에는 신라의 경명왕, 신덕왕, 아달라왕의 큰 무덤이 있는 곳이 있는 삼릉계곡이 있다. 삼릉계곡의 선각마애육존불상을 탐사를 마치고 육존불이 새겨진 바위 왼쪽 위로 400여미터를 올라 가니 높이 10여미터의 큰 바위가 나타난다.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고 올려다 보니 가로로 중간 부분을 끌로 판 듯 갈라진 위치에 작으나 위엄 있게 앉아 있는 선각여래좌상이 보인다. 방위계를 보니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부분의 마애불은 동쪽이나 남쪽을 향해 있는데 드문 경우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세히 보니 전체가 세련되지 못한 수법의 선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신체 위에 돋을 새김으로 얼굴만 도드라지게 표현한 도특한 기법으로 조각 되었다. 올라 올 때 언뜻 보니 위엄 있으나 못나 보였는데 다가서서 자세히 보니 눈읏음 치는듯 한 실눈, 우뚝하고 두리뭉실한 코,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우묵한 입술의 도형에서 부처라기보다는 아랫마을의
(시사1 = 김재필 기자) 단풍이 짙어가는 올 가을엔 고궁을 찾아 가는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건물이 기울고 뒤틀려 2017년부터 해체 복원작업에 들어갔던 경복궁 향원정이 4년만에 새 모습으로 단장되어 24일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 보여 올 가을엔 더 아름다워진 향원정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향원정(보물 제 1761호)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하여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로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었다. 당시 취향교의 위치는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는데, 1953년에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었다. 눈으로 보기에 달라진 향원정은 향원지로 건너는 다리인 취향교의 위치다. 남쪽에 지은 취향교를 철거하고 북쪽에 하얀 아치형으로 지어 향원정 건축 초기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것이다.
(시사1 = 김재필 기자) “음악은 처음부터 규칙으로 시작해 규칙으로 끝난다. 음악은 매우 수학적이다. 미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다. 나는 자유로움 때문에 미술에 매료됐다.” "조영남 입니다.“라는 주제로 조영남 초대전이 2021년 10월 6일부터 10월 30일까지 장은선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대작(代作)논란의 중심에 섰던 과거를 딛고 새롭게 창작에 몰입한 그가 작품 35점을 선보이고 있다. 백퍼센트 본인의 노력으로 작업한 화투, 초가집, 태극기등 시대를 넘나드는 기지 넘치는 작품들은 화업 50년의 연륜을 담고 있다. 대중음악가이며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조영남은 화투, 바둑판, 소쿠리와 같은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하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화면은 강한 구성적 패턴을 지니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작업해 온 평면 회화에서 공통되는 것은 일루전(Illusion)의 탈피다. 언제나 직접적 현실로 되돌아와 있다. 그 자체로 이미 현실적 물체로써 화면에 끌어들여진 것이다. 이 점에서 조영남의 그림은 처음부터 오브제성이 강한 회화로 특징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한 층 더 진지한 작품세계를 펼친 조영남만의 그림이 전시된다. 조영남 작품은 한국인의 정서를 반영
(시사1 = 김재필 기자) 천안시에서 서남쪽으로 자연휴양림이 잘 조성되어 있는 높이 455m의 태학산(泰鶴山)이 있다. 이 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천안 고을 남쪽 18리에 위치 한다' 라고 기록돼 있고, 1872년 지방 지도(1872年地方地圖)에는 태화산(泰華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 지형도(朝鮮地形圖)와 한국 지명 총람에는 태화산(太華山)으로 한자를 달리해 표기하고 있다. 헌데 지금처럼 태학산이라고 불린 것은 이 산의 중턱에 위치한 태학사(泰鶴寺)의 이름을 따서 흔히 태학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산 모양이 학이 춤을 추는 형상 이라서 태학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태학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 산책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양쪽에 절이 보인다 왼쪽은 태학사(태고종) 오른쪽은 법왕사가 경계(담)도 없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좀 서성이다가 마애불 안내판을 보니 태학사가 관리사찰로 지정되어 있다는 내용을 보고 태학사를 찾아가니 주지스님도 출타하신듯 염불소리 조차 안 들리는 조용한 절집이다. 태학사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로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
(시사1 = 김재필 기자) “당시 부대 뒷산인 일월봉 진지 위에 큰 돌이 불완전하게 서 있었어요. 그때 나는 아래로 돌이 굴러 내려질까 봐 병사들과 함께 돌을 밑으로 떨어뜨릴려고 힘껏 밀어봤어요. 헌데 꿈쩍도 안 했어요 할 수 없이 그냥 놔 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돌이 마애사면불(磨崖四面佛·)이었어요. 장정들이 몇 번이나 힘껏 밀었는데도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다 부처님의 뜻이었겠죠.” 위의 말은 1981년에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민간인 통제구역(DMZ)에 있는 한 부대에 복무 중인 임OO 원사가 병사들과 지뢰 탐사 중에 처음 사면불(당시엔 사면불인 줄 몰랐을 것이다)을 발견한 당시의 일화를 말한 내용이다. 그 때 그 돌이 밑으로 굴렀다면 우린 귀한 문화재 한기를 잃었을 터이지만 임원사의 말대로 부처님의 뜻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았으니 큰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1995년 8월7일 군사보호구역 문화재학술조사팀에 의해 사면불은 재발견 되어 경기유형문화재 제 156호로 지정됐다.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한 사방불은 1세기경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기존 개념이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6방, 8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