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6. 관리(官吏) 인사관리에 엄격한 심사기준 적용 정치체제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시행한 후 제반정책들이 정상 궤도에서 운영되자 송태조 조광윤은 관리(官吏)들을 심사하는데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송나라 초기에 조광윤은 관리에 대해 당나라와 비슷하게 청렴성, 신중성, 공평성, 성실성, 직무수행완성도 등을 심사기준을 세웠으나, 그 범위는 훨씬 넓어 중앙과 지방의 각급 각 분야에서 실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관리들에 해당되었다. 그는 주, 현의 인구가 늘어나고 세금징수를 완수한 정도에 따라 지방관리들의 실적을 평가했고, 관리들이 성실히 업무에 임하는 태도와 과거에 처벌이나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를 심사조건으로 삼아 관원들의 등급을 결정했다. 963년(태조4) 11월, 조광윤은 지방관리들을 심사할 기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주, 현 관리가 경제부양책을 잘 실시하여 세대수가 늘어난 자는 10점에 1점을 추가하며, 자사(刺史), 현령(縣令)은 한 등급을 올린다. 주의 세대수가 5천호 미만인 곳은 5천 세대를, 현의 세대수가 5백호 미만인 곳은 5백 세대를 1점으로 정한다. 경제부양책을 잘 수행하지 못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5. 고위문관에게 인재추천권 부여 천하를 얻은 송태조 조광윤에게 있어서 직면한 주요 과제는 통일대업을 이루는 동시에 나라를 잘 다스려나가는 것이었다. 통일대업은 군 장령과 모사(謀士)들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잘 싸우면 된다. 조광윤 자신이 천하제일의 군사전략가이며 그의 수하에는 용맹하고 잘 싸우는 장군이 많으며 강한 정예군이 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싸우는 것과 다르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많은 지식인과 도덕성이 높은 인재가 중앙과 지방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세 하에서의 급선무는 훌륭한 인재를 뽑는 것이었다, 962년(태조3) 3월에 조광윤은 조령을 반포했다. 「일찍이 막부(幕府)의 직책이나 주, 현의 관직에 있었던 경력이 있는 한림학사나 상참관은 빈좌(賓佐), 영록관(令錄官)을 담당할만한 자를 각기 한 명씩을 추천할 수 있으며, 친족 가운데도 인재가 있으면 천거할 수 있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나약하거나 직무에 소홀한 자를 추천할 경우에는 그 죄를 물을 때 천거한 자도 연좌(連坐)책임을 져야 한다.」 송나라가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광윤은 관리를 선발함에 있어서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4. 송태조의 두 번째 연호 ‘건덕(乾德)’에 얽힌 이야기 한 사건이 송태조 조광윤으로 하여금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했다. 965년(태조6)에 후촉을 평정한 후 조광윤은 일부 후촉 궁녀들을 궁에서 일하게 했다. 후촉 궁녀들은 궁에 들어오면서 원래 쓰던 일상용품들을 갖고 들어왔다. 조광윤은 궁녀들의 화장대를 둘러보다가 구리로 된 거울 뒤편에 “건덕4년주(乾德四年鑄)”라고 쓰여 있는 글씨를 발견했다. 의아하게 생각한 조광윤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현재는 건덕(乾德) 3년 초인데 어떻게 건덕(乾德) 4년에 주조한 거울이 있는가?」 좌우가 대답을 못하자 조광윤은 재상 조보에게 물었다. 그런데 조보도 역시 대답하지 못했다. 조광윤은 또 한림학사(翰林學士) 도곡(陶谷)과 두의(竇儀)를 불러 물었다. 비로소 두의가 대답했다. 「전촉왕(前蜀王) 왕연(王衍)이 ‘건덕(乾德)’이란 연호를 쓴 적이 있는데, 이 거울은 틀림없이 전촉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조광윤은 어이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건륭(建隆) 말년에 재상에게 연호를 바꾸라고 했을 때, 이전 왕조들이 쓴 적이 없는 연호를 선택하라고 특별히 당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3. 국자감(國子監) 부흥 송나라 초기에 사대부와 글을 올리는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 조광윤의 기본국책이었다면, 교육을 중시하고 대대적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이것은 “지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조치들이었다. “나무를 기르는 데는 십년이 필요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는 백년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이 국운을 오래 유지하려면 반드시 교육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다 많은 지식인을 육성해야 한다. 일찍이 961년(태조2) 11월, 조광윤은 상국사(相國寺)를 행차할 때, 일정에도 없이 갑자기 후주 세종이 설립한 국립대학 국자감(國子監)을 시찰했다. 그러나 송태조 조광윤이 시찰할 때 본 세종이 세운 국자감은 폐교된 황량한 모습이었다. 당나라 말과 오대시기에 중국은 근 1백년 간 전란이 그치지 않았고, 군벌이 권력을 전횡해 세상은 평안할 날이 없었다. 그러므로 교육도 전례 없는 파괴와 외면을 당했다. 지식이 쓸모없게 되자 국학(國學)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사학(私學)을 운영하는 자도 없었으며, 전란으로 고난에 허덕이는 민생은 교육에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후주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2. 세 줄의 유훈(遺訓) 「서약비(誓約碑)」 역사서에 송태조 조광윤이 유생(儒生)을 비롯한 지식인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특별히 궁내에 융유전(隆儒殿)을 설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962년(태조3) 조광윤은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비석을 새기게 하여 침전의 협실에 보관하고 이름을 ‘서비(誓碑)’라고 명명했다. 그는 이 서약비(誓約碑)에 금박 입힌 노란 휘장을 덮어놓고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그는 친히 유관 부서에 지시해 이 서약비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어서는 안 되며, 제사의식이나 새 황제가 등극할 때 유관부서에서 반드시 황제에게 주청을 올려 이 서약비를 읽도록 하라고 했다. 그는 또 황제가 비문의 서약을 읽을 때는 반드시 글을 모르는 어린 내시가 수행해야 하며 관리들은 멀리 정원에 서 있어야 하고 황제는 혼자 꿇어 앉아 속으로 묵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와 같이 신비하고 장중한 참배의식은 몇 대(代)를 내려오면서 신하들과 시종들은 그 비문에 어떤 서약이 쓰여 있는 것만 알았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금(金)나라 군사가 침입해 변경(汴京)이 함락되어서야 이 서약비의 면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송태조 조광윤은 전통문화의 적극적인 추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군인가정에서 태어나고 또 군인신분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결코 군인이 시대의 개혁자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그는 “아무리 용맹한 군인일지라도 일자무식하고 지혜가 없으면 큰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후주시기에 회남지역을 정벌할 때, 남당 대장군 황보휘(皇甫暉)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저주(滁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광윤은 겨우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저주를 공격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걱정하며 말했다. 「적의 병력이 아군보다 20배나 많은데 이 싸움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지장(智將) 조광윤은 이렇게 대답했다. 「황보휘는 용맹하나 야인(野人)에서 출세하여 속에 든 것이라곤 전혀 없는 무인에 불과하니 10만 대군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갖고 20배도 넘는 적의 병력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광윤은 병법에 의해 첫 번째 교전에서는 황보휘를 대파했고, 두번째 교전에서는 용감무쌍하게 홀로 10만 적군 속을 뚫고 들어가서 단칼에 황보휘를 생포했다. 이로써 문화와 지식이 있고 병법을 아는 지장(智將)과 필부지용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 조광윤은 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후대의 황제들에게 유훈(遺訓)서약비(誓約碑)를 남겨“사대부(士大夫)와 글을 올린 자를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나라의 경제와 문화 발전을 위해 문관을 우대하고 과거제도를 정비하는 등 문신치국(文臣治國)정책을 역점 추진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그가 추구했던‘내부를 안정시켜서 외적을 막는 안내외수(安內外守)의 정책’은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거란(契丹)에 조공을 바치는 문약(文弱)한 나라로 전락하고,금(金)나라에게 쫓겨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후 결국은 몽고(蒙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만일 후손 중에 조광윤과 같은 명군이 있어 문신치국의 병폐가 나타날 즈음 정치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면 강한 나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지식인에 의존해야 하고, 그러려면 교육과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 이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이 10세기의 전제봉건황제인 송태조는 체계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지식을 숭상하고 교육을 보급시키며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결부시킨 사람으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인자한 마음을 지닌 조광윤은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베풀어준 따뜻한 황제였다. 그는 법률조문에 명시한대로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안건 처리에서도 항상 형의 집행을 유예하도록 했다. 그는 변경부(汴京府)가 심판한 한 안건을 자세히 검토한 다음 수십 명의 죄인을 풀어준 적이 있다. 967년(송태조8) 4월, 그는 나무몽둥이를 들고 절도행각을 한 자는 일률로 사형에 처한다는 사법조문을 보고 조령을 내려 비록 몽둥이를 들고 절도행각을 했더라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 자는 장물(臟物)의 양에 따라 죄를 묻도록 했다. 969년(태조10) 5월, 일찍 찾아온 찜통더위 때문에 사람들은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유민들도 무더위를 이겨나가기 어려운데 포승에 묶여 있거나 칼을 쓰고 옥에 갇힌 죄인들은 더욱 겪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 조광윤은 각 주에 조령을 내려 옥리들이 5일에 한 번씩 감옥을 순찰하고 깨끗하게 청소하며 형구들을 물로 씻고 몸이 허약한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환자에게는 약을 제공하며 경미한 죄를 지은 자는 감옥 안의 마당에서 거닐 수 있도록 하거나 석방하도록 했다. 이후부터 무더운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7. 입법은 관대하게, 법 집행은 엄하게 모름지기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법제만 있어서는 안 된다. 법제는 다만 사회의 한 부분만을 다스릴 뿐이며 사람을 피동적으로 다스리는 수법에 불과하다. 천하를 잘 다스리려면 덕으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백성의 자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송태조 조광윤은 형벌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싶지 않았고 사회에 가혹한 형벌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회에는 이익 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추구하기 위해 법을 위반하고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그러므로 법률을 제정하여 불법행위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 9경(九經)에 의한 인덕문화와 도가문화의 교육을 받아온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에도 천하에 인정을 베풀려고 했기 때문에 법률을 간소화하고 형벌을 감소시키며 과중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는 등 인덕과 관대함으로 천하를 다스려나갔다. 예컨대 송나라가 남한을 평정하기 전에 현지의 백성들은 유창(劉鋹)의 가혹한 압박을 받아왔다. 유창은 간악한 재상의 종용 하에 매우 가혹한 형법을 제정했다. 남한이 송나라에 의해 통일되었을 때 그 곳에는 도적떼가 창궐했다. 당시의 법률에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6. 황실가법(皇室家法) 제정 봉건전제사회에서 철저하고 진정한 법치사회를 수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봉건전제사회의 성격상 법률은 완전히 황제의 이익에 따라 좌우되며, 법이 황제의 뜻에 위배되거나 황실가족이 법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장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송태조 조광윤의 개인적 품성을 놓고 볼 때 법전을 제정한 이상 그 자신도 되도록 법제를 준수하려고 했다. 어느 날 조광윤이 후원(後園)에서 새총으로 참새를 잡고 있었는데 환관이 와서 어떤 신하가 급한 일로 알현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급한 일이라 하니 그도 할 수 없이 놀던 흥을 깨고 그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찾아온 신하가 하는 얘기는 다 평범한 일들이었다. 조광윤은 노발대발했다. 「아니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더니 고작 이러한 일들이오?」 찾아온 신하가 말했다. 「급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참새 잡는 일 보다는 급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더욱 화가 치민 조광윤은 옆에 있는 도끼를 들어 냅다 휘둘렀는데, 잘못하여 그 신하의 입에 맞는 바람에 앞니 두 대가 부러져 나갔다. 그 신하는 조용히 땅에 엎드려서 부러진 이를 품에 주워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