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민위방본(民爲邦本)’의 국가경영철학 구현 <41>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

6. 황실가법(皇室家法) 제정

 

봉건전제사회에서 철저하고 진정한 법치사회를 수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봉건전제사회의 성격상 법률은 완전히 황제의 이익에 따라 좌우되며, 법이 황제의 뜻에 위배되거나 황실가족이 법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장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송태조 조광윤의 개인적 품성을 놓고 볼 때 법전을 제정한 이상 그 자신도 되도록 법제를 준수하려고 했다.
어느 날 조광윤이 후원(後園)에서 새총으로 참새를 잡고 있었는데 환관이 와서 어떤 신하가 급한 일로 알현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급한 일이라 하니 그도 할 수 없이 놀던 흥을 깨고 그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찾아온 신하가 하는 얘기는 다 평범한 일들이었다. 조광윤은 노발대발했다.

「아니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더니 고작 이러한 일들이오?」
찾아온 신하가 말했다.

「급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참새 잡는 일 보다는 급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더욱 화가 치민 조광윤은 옆에 있는 도끼를 들어 냅다 휘둘렀는데, 잘못하여 그 신하의 입에 맞는 바람에 앞니 두 대가 부러져 나갔다.
 
그 신하는 조용히 땅에 엎드려서 부러진 이를 품에 주워 담았다.
 
본의 아니게 병기로 사람이 다치게 되자 조광윤은 당황스러웠다. 그는 그 신하를 부추겨 세우고 위로하려 하는데 이빨을 주워 넣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나를 고발하려는 거요?」
그 사람이 말했다.

「신(臣)이 어찌 감히 황제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사관(史官)이 알아서 역사서에 기록하겠지요.」

이 말에 노기가 말끔히 가신 송태조 조광윤은 그 사람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금화와 비단을 하사했다.

어사관(御史官)이 황제의 잘못을 문헌에 기록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일종의 징벌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은 옛날부터 있었다. 물론 황제는 법률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 위에 군림하므로 이 이야기를 법규와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법규가 황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구속력이 있었다는 것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966년(태조7) 3월 대리사경(大理寺卿) 고계신(高繼申)은 『송형법』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에 비추어 조정관리들의 친속(親屬)이 범죄행위를 했을 경우 적용하는 음형(陰刑)에 관한 조문을 수정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세월은 이미 깊어 가는데, 불손한 자손들은 조상의 관품을 믿고 법규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상의 친속으로서 면죄부를 받으려는 자는 그 조상이 반드시 조정의 관직에 임용된 바 있어야 하며, 이전 왕조의 관리등급으로 따진다면 나라에 공을 세웠거나 백성에게 혜택을 준 자로서 3품 이상의 관리여야 마땅합니다.」

이 건의는 두말할 것 없이 법의 집행을 강화하고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조광윤은 고계신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특권계층의 음형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사실상 조광윤도 오래 동안 계속되어온 음형(陰刑)과 같은 위법행위를 비호하는 조문에 대해 불만을 표해왔었다.

 

 송나라 사람 여중(呂中)은 황실의 가법(家法)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외척에 대해 적지 않은 혜택을 베풀면서도, 정사(政事)에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지방에서 자사(刺史)를 맡을 수 없게 하여, 송대(宋代)에 외척으로 인한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환관(宦官)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게 했지만 마구 죽이는 일도 없었다. 환관으로 인한 조정의 혼란이 없었기 때문에 선휘원(宣徽院)에서 제명하는 일도 없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황실의 가법을 세움으로써 외척의 전횡과 환관들의 득세를 억제했다. 이러한 조치에 힘입어 송나라는 319년 동안 황실 인척이나 환관으로 인한 내란이 없었다.

“형벌은 황제의 처자뿐만 아니라 형제에게도 적용함으로써 나라를 바르게 다스려 나간다.”고 했다. 전제제도 하에서 조광윤은 이렇게 황실의 가법(家法)을 만들어 황실 인척들의 위법한 행동을 엄중히 단속했다. 이것은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는 그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