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자감(國子監) 부흥
송나라 초기에 사대부와 글을 올리는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 조광윤의 기본국책이었다면, 교육을 중시하고 대대적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이것은 “지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조치들이었다.
“나무를 기르는 데는 십년이 필요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는 백년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이 국운을 오래 유지하려면 반드시 교육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다 많은 지식인을 육성해야 한다.
일찍이 961년(태조2) 11월, 조광윤은 상국사(相國寺)를 행차할 때, 일정에도 없이 갑자기 후주 세종이 설립한 국립대학 국자감(國子監)을 시찰했다.
그러나 송태조 조광윤이 시찰할 때 본 세종이 세운 국자감은 폐교된 황량한 모습이었다.
당나라 말과 오대시기에 중국은 근 1백년 간 전란이 그치지 않았고, 군벌이 권력을 전횡해 세상은 평안할 날이 없었다.
그러므로 교육도 전례 없는 파괴와 외면을 당했다. 지식이 쓸모없게 되자 국학(國學)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사학(私學)을 운영하는 자도 없었으며, 전란으로 고난에 허덕이는 민생은 교육에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후주 세종도 나라를 잘 다스리고 교육을 회복하려고 국자감을 설립했으나, 해마다 전쟁을 치러야 했으므로 국자감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교육정책에 관심이 깊은 조광윤은 특별히 국자감을 둘러보았는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황폐하고 참담한 폐교의 모습은 번창하는 신흥왕조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이를 본 송태조 조광윤은 “문화와 교육을 다시 진작시키고 번영시켜야 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다.
조광윤은 유관부서에 명을 내려 국자감을 보수하고 성현들의 모습을 다시 만들어 이를 새롭게 단장하도록 명했다.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군신들이 교육정책을 중시하도록 했고, 친히 새로 단장한 국자감에 가서 공자(孔子)와 안회(顔回)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
동시에 대신들도 기타 성현들을 찬양하는 글을 쓰게 함으로써, 역사 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갖도록 했다.
조광윤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최송(崔頌)을 국자감 판사(判事)로 임명하고 학도들을 모집해 학업을 시작하게 했다.
이리하여 국자감에서는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이 소리를 듣고 조광윤에게 알리자 매우 기뻐한 그는 특별히 술, 과일 등을 보내 축하하고 격려했다.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이렇게 하면 사방의 백성들이 포대기에 자식을 싸 들고라도 모일 것이니라.」
송태조 조광윤이 교육을 중시하니 전국의 관민들도 자연히 학습열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광윤이 교육에 관심을 돌리니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아오고 쉽게 만족해 하는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연히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고무되었다. 교육이 번영하면 나라가 부흥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