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문관 우대정책 실시(02)

제1절 문관 우대정책을 위한 기반 조성

송태조 조광윤은 전통문화의 적극적인 추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군인가정에서 태어나고 또 군인신분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결코 군인이 시대의 개혁자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그는 “아무리 용맹한 군인일지라도 일자무식하고 지혜가 없으면 큰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후주시기에 회남지역을 정벌할 때, 남당 대장군 황보휘(皇甫暉)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저주(滁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광윤은 겨우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저주를 공격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걱정하며 말했다.

「적의 병력이 아군보다 20배나 많은데 이 싸움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지장(智將) 조광윤은 이렇게 대답했다.

「황보휘는 용맹하나 야인(野人)에서 출세하여 속에 든 것이라곤 전혀 없는 무인에 불과하니 10만 대군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갖고 20배도 넘는 적의 병력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광윤은 병법에 의해 첫 번째 교전에서는 황보휘를 대파했고, 두번째 교전에서는 용감무쌍하게 홀로 10만 적군 속을 뚫고 들어가서 단칼에 황보휘를 생포했다.

이로써 문화와 지식이 있고 병법을 아는 지장(智將)과 필부지용(匹夫之勇)만 있는 장군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오대시기 제왕들의 문화자질이 천차만별인 것과는 달리 송태조 조광윤은 문화와 지식을 중요하게 여겨 문인을 중용했으며, 후주의 장군으로 있을 때도 줄곧 문인을 기용해 군무를 보좌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의 막부에는 문인이 많았고, 군을 다스리는데 큰 효력을 발휘했었다.

후주의 장군으로 있을 때, 조광윤에게는 조보(趙普), 심륜(沈倫), 왕인섬(王仁贍), 초소보(楚昭輔), 이처운(李處耘) 등과 같은 문인들이 있었다.

바로 이들 문인 참모들이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군 내부상황에 순응해 진교병변을 획책했기 때문에 조광윤은 평화적 병변으로 후주를 교체하고 송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문덕을 중시해 나라를 얻고 후세로 하여금 319년간 존속하게 했다.

오대시기의 후량(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는 무력으로 나라를 얻었기 때문에 후세는 기껏해야 4~5년, 길어야 십여 년 밖에 존속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문덕으로 다스리는 것과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그만큼 우열이 갈라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