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유럽, 폴란드의 야기엘로니아대학에서 지난 4월 2일 아시아를 좋아하는 학생들 주최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인도의 문화를 알리는 <아시아축제>가 온종일 1천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 <한복 입은 모델 같은 폴란드 남녀학생들> 이날 한국학과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아, 이제 정말 세계가 한 마을이 됐구나. 한국이 세계적으로 참 많이 알려졌구나!” 하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중에서도 특히 한국학과 여학생이 한국어강의를 했는데, 청중들이 너무 많아서 강의실을 꽉 메우고도 복도까지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정작 교수인 나는 강의실 안에 들어가 볼 수 조차 없었다. 이때 중국, 일본, 인도 행사를 주관하는 학생들이 청중들로 북적대는 한국이벤트를 눈여겨보면서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 <요안나 바르뎅가 중국문화원장과 함께> ▲ <한국이름 써주기 행사> ▲ <한국엄마와 폴란드아빠를 둔 4남매와 윷놀이> ▲ <정수경강사와 윷놀이담당 학생> 한국과 관련해서는 학생들의 한국어강의 외에도 윷놀이, 제기차기, 한글이름 써주기, K-Pop 댄스, 한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2. 담대하고 비범한 어머니 두태후(杜太后) 조광윤의 어머니 두태후는 아버지 두상(杜爽)과 어머니 범(範)씨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두씨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홍은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이 늘 전쟁터를 떠돌고 있는 동안 시부모(媤父母)를 지극하게 공경하면서 예의와 법도를 중시하고 살림살이를 규모 있게 잘 꾸려나갔다. 조광윤이 후주시절 남당과의 저주대첩(滁州大捷)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세종은 그를 전전도지휘사와 광국군절도사로 임명하면서, 그의 어머니 두씨에게도 ‘남양군태부인(南陽郡太夫人)’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두태후는 조홍은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아 그 중에서 두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다. 차남 조광윤은 송태조가 되었고, 3남 조광의는 송태종이 되었다. 장남 광제(匡濟)와 막내 광찬(匡贊)은 일찍이 요절했다. 다만, 4남 광미(匡美)는 두태후 소생이 아니라고 한다. 두태후의 두 딸 중 장녀는 조광윤의 누나인 진국장공주(陳國長公主)이며 15세에 요절했고, 차녀는 그의 누이로 연국장공주(燕國長公主)이다. ▶ 두태후와 조홍은의 만남 조홍은이 젊었을 때 어느 날 정주(定州) 안희(安喜)를 지나고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조광윤은 봉건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늘아래 둘도 없는 고귀한 신분인 황제였지만, 그는 한 인간으로서 부모에게는 출천대효의 효자였으며, 형제자녀들에게는 훌륭한 가장이었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제왕이었다. 그는 후주의 장군시절이나 황제가 된 이후에도 언제나 검소하고 청렴하였다. 측근에게 마음을 열고 온정을 베풀어 많은 인재들이 몰려와 그를 도움으로써, 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마침내 지고지상의 황제까지 되었다. 나아가 3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는 굳건한 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찬란한 송대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다만, 매사에 철두철미했던 그도 천려일실(千慮一失)로 동생을 너무 믿었던 까닭에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의문에 가려진 죽음을 당하고 직계후손들까지 핍박받았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1. 무장출신의 아버지 조홍은(趙弘殷)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용맹하고 날랬으며, 달리는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쏠 정도로 말타기와 궁술에 능했다. 무인이 득세하던 당말(唐末: 899년)에 태어나, 오대시기에 성장한 그는 문관이었던 선조들과는 달리 당시 무인집권시대의 세상흐름에 따라 무관이 되었다. 그
제4절 송태조의 고려(高麗)에 대한 외교정책송태조 조광윤은 개국 초기에 두 이씨(李氏)의 반란을 진압하고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통해 황권에 위협이 되는 금군(禁軍) 고위장군들의 병권을 회수하는 등 내정(內政)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눈길을 나라 밖으로 돌려 동방의 고려(高麗)와 선린우호관계를 가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962년(태조3)에 그는 좌효위대장군(左驍衛將軍) 석희(石曦)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국교수립 의사를 전달했다. 고려 광종 왕소(王昭)는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같은 해 답례로 이흥우(李興祐)를 송(宋)에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비로소 양국 간에 국교(國交)가 시작되었다. 고려 광종은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후주(後周)가 건국되자 그때까지 자체적으로 써왔던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없애고, 951년(후주태조1, 고려광종2)부터 후주(後周) 태조의 연호 ‘광순(廣順)’에 이어 세종의 연호 ‘현덕(顯德)’을 사용해왔었다. 그러나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그동안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터라, 광종은 다시 ‘광덕(光德)’이라는 이전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962년 송태조 조광윤이 고려는 ‘동방의 군자의 나
폴란드에 온지 3년만에 모처럼 야기엘로니아대학교 한국학과 학생 수십 명과 함께 브로츠와프(Wrocław)에 있는 한국대기업 LG와 POSCO 공장을 견학했다.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중서부에 체코와 독일과 인접해 있고, 바르샤바, 크라쿠프, 포즈난 다음으로 큰 인구 60여만명의 도시로서 대규모의 LG단지가 위치해 있다. 이번 LG와 POSCO 견학은 버스로 4시간 걸리는 꽤 먼 여정이었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을 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했다. 또한 한국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한 보람있는 기회였으며, 기대 이상의 좋은 성과를 거뒀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LG단지에 들어서면서부터 예상외로 큰 규모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LG Display가 LED TV 등 최고급 가전제품을 최첨단기술로 만들어내는 제조공정과 POSCO의 섬세한 철재(鐵材) 가공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는 세계적 브랜드의 대기업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삼성, 현대, LG 등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 학생들은 대규모공장에서 세계최고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관찰했으며, 견학을 마치고 나오면서 모두들 밝고 만
제3절 각국 평정 후 완벽한 사후관리5. 남당(南唐) 평정 후 승전(勝戰)을 상례(喪禮)로 치르다 975년(태조16)에 남당왕 이욱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변경(汴京)에 전해지자 문무백관들이 송태조 조광윤에게 축하의 예를 올렸다. 그런데 그는 남당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지역이 분열되어 백성이 그 화를 입고 있었소. 성을 공격하면 필히 칼을 맞은 사람이 있을 테니 실로 애통하도다.」 조광윤은 거짓으로 우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마음속으로부터 오러나는 진심으로서 “승전을 했다 해도 죽은 자가 많으면 슬퍼하고, 상례(喪禮)로 취급하는 도가(道家)의 반전연민사상(反戰憐民思想)”의 표출이었던 것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넓은 도량(度量) 도량(度量):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광윤은 성을 공격할 때 백병전(白兵戰)에서 죽은 장병들을 불쌍히 여겼고 적국의 왕들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조광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자축(自祝)하지 않았고, 살인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애통하게 여겨 상례(喪禮)로 처리했으니 그는 천하에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제3절 각국 평정 후 완벽한 사후관리3. 후촉왕 맹창의 노모를 국모(國母)에 봉하다 965년(태조6) 초, 후촉왕 맹창(孟昶)은 그의 남동생 맹인지(孟仁贄)를 변경(汴京)에 보내 투항서를 올리도록 했다. 그는 투항서에서 12세에 즉위하여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세월만 흘러갔다는 것, 진심으로 항복하며 노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등을 언급하면서 구구절절 애절한 심경을 고백했다. 조광윤은 이를 읽으면서 동정심이 생겼고 맹창의 노모가 아직 살아있다는 말에는 더욱 불쌍한 생각이 들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는 위로의 조서를 보냈다. 「그대는 스스로 다복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이것으로써 과거 잘못을 상쇄해 주겠소. 짐(朕)은 언약한 것을 지킬 것이니 심려를 놓기 바라오.」 후촉에서 조광윤의 뜻을 전달 받은 맹창은 마음 놓고 짐을 꾸렸다. 그가 가족을 데리고 배로 장강에서 남하하여 강릉에 도착했을 때, 조광윤은 벌써 사람을 파견해 마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맹창 일행은 배에서 내려 마차를 타고 북상하여 5월 하순에 변경에 도착했다. 조광윤은 투항한 맹창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겸 중서령(中書令), 진국공
제3절 각국 평정 후 완벽한 사후관리1. 5개국 평정 후 그곳 백성들에게 세금 대폭 감면 963년(태조4) 조광윤은 형남과 호남 두 개의 작은 나라들을 연이어 평정하고 31개 주, 1개 감(監), 83개 현의 토지와 24여만 세대의 인구를 획득했다. 형남과 호남의 두 개 할거정권은 장기 집권하면서 백성들에 대해 가혹한 착취와 노역을 감행했다. 형남통치자들은 황음무도한 생활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는 거리의 창기(娼妓)들을 궁에 불러들여 건장한 병사들과 음란행위를 하도록 하고는 자신과 애첩은 먼발치에서 구경하며 심심풀이로 삼는 한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형남통치자들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호화스러움을 뽐내면서 수많은 누각을 세워 백성의 재물을 탕진했다. 농민들은 부역에 징용되어 농사지을 노동력이 없게 되고 전답이 황폐되어 곡식 수확량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세금을 징수해 백성의 원성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송조(宋朝)가 형남과 호남을 통일한 후 조광윤은 장기간 착취와 압박을 받아온 이 두 지역의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많은 빚을 탕감해주도록 명을 내렸다. 그해 7월, 조광윤은 형남 관할 내에 있던 주민들은 여름세금의 절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7.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과는 신뢰관계 유지 조광윤은 작은 나라에 대해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점령할 것을 주장했고, 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귀순하면 작위(爵位)를 주어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했으며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았다. 다투지 않는 덕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며 하늘의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이 바로 그가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오월(吳越)에 대한 기본책략이었다. 오월은 중원왕조에 대해 항상 공손하고 조신한 태도를 취했다. 송조(宋朝)가 건립된 후 오월왕 전숙(錢俶)은 즉시 송조에 귀순했고, 송태조 조광윤은 그를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로 봉했다. 중원의 송조가 갈수록 강대해짐에 따라 강남의 대부분 정권은 송조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런데 오월왕 전숙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욕심이 없었고 “욕심이 없으면 무해 무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그를 믿었고 오월정권은 굳게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오월국의 내부에도 전숙이 송조를 돕는데 대해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승상(丞相) 심호자(沈虎子)가 간언을 올렸다. 「강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5개국 평정 후 거대한 영토와 인구 획득 송태조 조광윤은 즉위 초부터 선남후북정책을 채택하고 중국통일대업을 개시하여 12년 동안 형남, 호남, 후촉, 남한, 남당 등 5개국을 평정함으로써, 통일계획의 90% 이상을 달성했다. 북쪽의 조그만 땅 북한만을 남겨놓았고, 오월(吳越)과 장천(漳泉)은 스스로 송나라에 복속하였다. 963년(태조4) 2월, 호남 가는 길을 빌려 형남(荊南) 형남(荊南): ‘남평(南平)’ 또는 ‘남평국(南平國)’이라고도 한다. 을 평정했다. 이때 송군(宋軍)은 활 한대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릉을 점령했다. 형남왕(荊南王) 고계충(高繼冲)은 3개 주, 17개 현, 14만 3,300세대를 송나라에 바치고 왕권을 양도했다. 963년(태조4) 10월, 호남(湖南)을 공격해 호남왕(湖南王) 주보권(周保權)의 항복을 받아내고 14개 주, 1개 감(監), 66개 현, 9만 7,000여 세대가 송나라에 귀속되었다. 965년(태조6) 1월, 후촉(後蜀) 정벌을 개시하고 66일 만에 후촉왕(後蜀王) 맹창(孟昶)의 투항함으로써, 송나라는 후촉의 46개 주, 240 현, 그리고 53만 4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