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개국 평정 후 그곳 백성들에게 세금 대폭 감면
963년(태조4) 조광윤은 형남과 호남 두 개의 작은 나라들을 연이어 평정하고 31개 주, 1개 감(監), 83개 현의 토지와 24여만 세대의 인구를 획득했다.
형남과 호남의 두 개 할거정권은 장기 집권하면서 백성들에 대해 가혹한 착취와 노역을 감행했다.
형남통치자들은 황음무도한 생활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는 거리의 창기(娼妓)들을 궁에 불러들여 건장한 병사들과 음란행위를 하도록 하고는 자신과 애첩은 먼발치에서 구경하며 심심풀이로 삼는 한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형남통치자들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호화스러움을 뽐내면서 수많은 누각을 세워 백성의 재물을 탕진했다.
농민들은 부역에 징용되어 농사지을 노동력이 없게 되고 전답이 황폐되어 곡식 수확량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세금을 징수해 백성의 원성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송조(宋朝)가 형남과 호남을 통일한 후 조광윤은 장기간 착취와 압박을 받아온 이 두 지역의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많은 빚을 탕감해주도록 명을 내렸다.
그해 7월, 조광윤은 형남 관할 내에 있던 주민들은 여름세금의 절반을, 낭주 주민들은 여름세금의 전부를 면제해 주었다.
그해 송태조 조광윤은 조칙을 내려 형남, 담주, 낭주 등지의 사형수들을 감형하고, 유배형 이하의 죄수들은 석방하고, 노역형을 받은 자는 풀어주었다.
5월에는 형남의 늙은 병사들을 제대시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6월에 조광윤은 또 한 차례 조령을 내려 형남의 병사들 중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자는 나라에서 집을 보수해 주고 경작에 쓸 소, 종자, 수확 전의 급한 식량 등을 배급해주었다.
군에 남으려는 자는 고향 근처의 복주(復州)와 영주(郢州)에 배치했다.
10월에는 담주, 낭주의 관병 수천 명에 대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도록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이전의 왕조들과는 크게 달랐다.
송태조 조광윤은 새로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렸던 점에 대해 동정하고 자비스런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와 옹호를 받게 되었고 경제의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이 지역들은 빠르게 송조(宋朝)의 통일을 위한 군사, 정치적 행동을 지원하는 후방기지로 급부상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중시하는 면에서 도가(道家)의 사상과 일치한다.
송군이 성도(成都)를 점령하자 후촉은 멸망되었다.
조광윤은 즉시 후촉의 관할지역에 대해 대사면을 실시하고 2년간 내지 못한 조세를 면제하고, 3년 이내의 여름세금은 절반으로 감면해주었다.
그리고 명분 없는 노역과 규정 외의 부과세를 폐지하고, 소금 값을 3분의 1로 내렸다.
또 식량이 없는 백성을 구제해주고, 전쟁에서 노획한 가축들은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도적떼들은 자수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조치들이 바로 백성들의 생명을 중시하고 생존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제정치체제 하에서의 ‘인자한 정치’인 것이다.
2. 후촉 평정 때 군기 문란했던 무장들을 엄벌
후촉을 평정하고 나서 송조(宋朝)가 후촉관리를 그대로 유임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는 감세정책을 대폭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안정되지 못하고 백성의 저항과 후촉군의 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송군의 일부 장군과 병사들이 출정하기 전에 송태조 조광윤이 강조했던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송군이 가는 곳에서 방화하거나 백성을 구타하고 노략질하거나 조상묘를 파헤치거나 뽕나무를 자르거나 하여서는 안 된다.」
왕전빈(王全斌)이 통솔한 송군이 성도(成都)를 공략한 후 그들은 큰 승리가 주는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주장(主將) 왕전빈은 최언진, 왕인섬과 함께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군무를 소홀히 했으며, 부하들이 백성의 자녀를 빼앗아 노리개로 삼고 재물을 약탈하도록 방관했다.
왕전빈이 우신무대장(右神武大將) 왕계도(王繼濤)와 공봉관(供奉官) 왕수눌(王守訥)로 하여금 후촉왕 맹창을 변경(汴京)으로 압송해 가도록 했는데, 왕계도는 공공연히 맹창에게 궁녀와 금은보석, 비단을 요구했다.
왕인섬이 군수물자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때, 후촉군의 주장이었던 무수(武守)절도사 이정규(李廷珪)의 죄를 물으려 했다.
겁에 질린 이정규가 강연택(康延澤)에게 계책을 묻자 그가 말했다.
「왕인섬은 가무와 여색을 밝히는 자이므로 그 욕구를 충족해주면 죄를 묻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평소에 기녀(妓女)를 멀리한 이정규였기에 부득이 친척 중에서 네 명의 여자를 구하고 수백만의 은자와 비단을 보내고서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정대신 여여경(呂余慶)이 성도에 부임했을 때 눈에 뜨인 것은 승리에 도취한 송나라 장병이 거들먹거리고 시장에서 공공연히 상인들의 재물을 빼앗아 후촉 사람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광경이었다.
후촉이 평정된 후 조광윤은 조령을 내려 후촉군대를 변경으로 출발시키고, 모든 병사들에게 의복과 급료를 충분히 지급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왕전빈 등은 마음대로 지급량을 줄이고 그들을 구타하고 우롱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후촉병사들은 면주(綿州)에 당도했을 때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후촉의 옛 장군인 전사웅(全師雄)을 주장으로 ‘흥국군(興國軍)’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십여 만 명이 집결했다.
성도부(成都府)의 10여 개 현(縣)이 호응했고, 과거 후촉의 46개 주 중에서 전사웅의 폭동에 따른 주가 17개나 되었다. 성도에서 변경에 이르는 우편로가 차단되고, 송군이 거둔 승리의 과실을 거의 잃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광윤은 사천(四川)에 증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송군이 후촉에서 저지른 일을 듣고 조광윤은 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주장 왕전빈과 유광의에게 당장 군부대를 정비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그는 한 유망한 젊은 장수가 부녀자의 유두를 도려내고 무참히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장 그 자를 변경에 불러들여 저자거리에서 참수했다.
조광윤은 슬픔과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군대를 동원해 토벌을 하는데 부녀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속히 처벌해 그 원혼을 달래주어야 할 것이오.」
백성을 위협하는 자에 대해 조광윤은 가차 없이 참수했다.
전직(殿直) 성덕균(成德均)이 후촉군 장병들을 변경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압송하는 도중에 그들에게서 금품을 갈취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사실을 명백히 규명한 후 조광윤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성덕균을 참수했다.
후촉을 공략했던 장군들을 처리할 때 조광윤은 법을 엄격히 적용했다.
남이 모르게 하려면 그 일을 안하는 수밖에 없는 법이다. 송군이 후촉의 성도를 공략했을 때 민가의 자녀들을 강제로 끌어가고 금은보석을 약탈하고 국고의 재물을 빼돌린 불법행위들이 후촉의 관리와 백성들의 고발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엄정한 조사를 거친 후 조광윤은 967년(태조8) 1월에 왕전빈 등을 소환해 죄를 물었다.
제일 먼저 조광윤 앞에 불려온 왕인섬은 모든 과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했다. 왕인섬이 후촉에서 저지른 죄행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조광윤이 그에게 물었다.
「이정규에게 기녀를 요구한 것과 풍덕부(豊德府)의 금패를 갈취한 것도 다른 사람의 소행인가?」
왕인섬은 그 즉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비로소 “하늘의 법망이 엉성한듯하나 악인은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조광윤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명령을 내려 왕전빈, 최언진, 왕인섬 등을 구속하도록 했다.
그들의 죄목을 심사할 때 신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재물을 강요하고 은닉한 죄행들에 대해 일일이 증명해 밝히도록 하고 그들이 갈취한 재물 64만 5천관을 몰수했다.
중서문하성에서는 또 왕전빈 등이 마음대로 병사들의 의류와 급료를 깎고 투항한 자를 살해한 사실 등의 죄목을 밝혀냈다.
968년(태조9) 1월 20일 조광윤은 어사대에서 문무백관을 소집해 그들의 죄행에 대해 심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튿날 문무백관들은 그 세 사람을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조광윤은 그들이 평소 세운 공을 감안해 사형을 사면해주고, 강제로 끌고 간 자녀와 말, 금은보석을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명하고 그들을 즉각 파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