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담대하고 비범한 어머니 두태후(杜太后)
조광윤의 어머니 두태후는 아버지 두상(杜爽)과 어머니 범(範)씨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두씨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홍은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이 늘 전쟁터를 떠돌고 있는 동안 시부모(媤父母)를 지극하게 공경하면서 예의와 법도를 중시하고 살림살이를 규모 있게 잘 꾸려나갔다.
조광윤이 후주시절 남당과의 저주대첩(滁州大捷)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세종은 그를 전전도지휘사와 광국군절도사로 임명하면서, 그의 어머니 두씨에게도 ‘남양군태부인(南陽郡太夫人)’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두태후는 조홍은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아 그 중에서 두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다. 차남 조광윤은 송태조가 되었고, 3남 조광의는 송태종이 되었다.
장남 광제(匡濟)와 막내 광찬(匡贊)은 일찍이 요절했다.
다만, 4남 광미(匡美)는 두태후 소생이 아니라고 한다. 두태후의 두 딸 중 장녀는 조광윤의 누나인 진국장공주(陳國長公主)이며 15세에 요절했고, 차녀는 그의 누이로 연국장공주(燕國長公主)이다.
▶ 두태후와 조홍은의 만남
조홍은이 젊었을 때 어느 날 정주(定州) 안희(安喜)를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우연히 두씨(杜氏) 집의 대문 밑에서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손님을 좋아했던 두씨의 아버지는 그를 발견하고 집안으로 불러들여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두씨 집안사람들은 영준하게 생긴 용모에 예의바르고 배운 사람답게 말을 잘하는 이 청년을 모두 좋아했다.
마침 이 집에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이 있기에 조홍은을 사위로 맞기로 결정했다.
두씨집은 조홍은과 딸을 집근처의 한 호숫가에서 만나게 하고 식구들은 몸을 숨겨 두 사람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두씨처녀와 조홍은이 이야기를 나눌 때 호수에서 두 마리의 용이 비등하는 것을 보고 두씨집 사람들은 길상이라고 하여 호수이름을 ‘쌍룡담(雙龍潭)’이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두씨처녀는 그와 결혼한 후 조광윤과 조광의를 낳아 모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인생의 전반부에 평범한 삶을 살아온 두태후는 두 아들이 황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황제가 되라고 교육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태후는 예법에 따라 가정을 잘 꾸려나가고 자식을 어릴 때부터 바르게 키워 훗날 영명한 성군이 되게 했으니 현모양처의 미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두씨의 고향 정주(定州)와 조홍은이 젊었을 때 근무했던 진주(鎭州)는 조광윤이 황제로 옹립된 진교병변과 묘한 관련이 있다.
960년 정월 초하루 정주와 진주로부터 북한군이 거란군과 연합해 후주를 침입하고 있다는 첩보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첩보에 의해 조정에서 조광윤에게 출병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 첩보의 출처와 진위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우선 정주는 두태후의 고향이며, 진주는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이 일찍이 군벌 왕용 휘하에서 무장으로 있었던 곳이다. 이를 추론해 보면, 조보와 조광의 등 조광윤의 최측근 참모들이 미리 정교하게 계획한 결과로 보인다.
조광윤의 부모의 연고지인 두 곳에는 조홍은이나 두태후의 친척들이 상당히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그 곳 현지인들과 모종의 사전 모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거짓첩보를 생산하더라도 다른 지역보다 안전성이 높으며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거짓첩보를 흘려줄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정주와 진주는 진교병변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황제의 씨앗이 뿌려진 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과 거란군이 연합해 침입해온다.”고 한 것은 이미 10년 전 950년 말경 곽위가 후주 태조로 즉위하기 직전과, 6년 전 954년 2월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 북한과 거란군이 연합해 침입한 선례가 있어서 이를 활용했던 것 같다.
당시 후주조정은 조광윤을 주장(主將)으로 하는 많은 군대를 출병시켰으나, 실제로는 북한군이나 거란군의 침입은 없었기 때문에 이 첩보는 십중팔구 계략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