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당(南唐) 평정 후 승전(勝戰)을 상례(喪禮)로 치르다
975년(태조16)에 남당왕 이욱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변경(汴京)에 전해지자 문무백관들이 송태조 조광윤에게 축하의 예를 올렸다.
그런데 그는 남당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지역이 분열되어 백성이 그 화를 입고 있었소. 성을 공격하면 필히 칼을 맞은 사람이 있을 테니 실로 애통하도다.」
조광윤은 거짓으로 우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마음속으로부터 오러나는 진심으로서 “승전을 했다 해도 죽은 자가 많으면 슬퍼하고, 상례(喪禮)로 취급하는 도가(道家)의 반전연민사상(反戰憐民思想)”의 표출이었던 것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넓은 도량(度量) 도량(度量):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광윤은 성을 공격할 때 백병전(白兵戰)에서 죽은 장병들을 불쌍히 여겼고 적국의 왕들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조광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자축(自祝)하지 않았고, 살인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애통하게 여겨 상례(喪禮)로 처리했으니 그는 천하에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976년(태조17) 5월에 남당의 망국 군주 이욱이 변경(汴京)에 도착했다. 조광윤은 그의 죄를 사면해 주고 위명후(偉命侯)에 봉했다.
조광윤은 광덕전(廣德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이욱과 그 군신들이 다 참석하도록 했다. 연회에서 조광윤이 남당의 이부상서(吏部尙書) 장계(張洎)와 한림학사 서현(徐鉉)에게 왜 남당왕 이욱이 하루 빨리 투항하도록 권유하지 않았는지 질책했다.
그 때 두 사람은 자신들은 남당의 대신들로서 마땅히 군주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의연하게 대답하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그들이 진정한 충신이라고 생각하며 탄복하고 중용했다. 조광윤은 이욱에게 물었다.
「짐(朕)은 그대가 경서(經書)도 깊이 연구하고 문학에 열중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들었소. 이번에 변경(汴京)으로 오는 도중에 많은 느낌이 있었을 텐데 무슨 신작(新作)이 없소?」
이욱이 말했다.
「예,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조광윤이 말했다.
「그럼 한번 읊어 보시겠소?」
이욱이 새로 지은 시를 읊기 시작했다.
40년 역사의 나라 광활한 삼천리강산에
화려한 궁전은 하늘 높이 떠있고
진귀한 초목은 정원 하나 가득한데
내 언제 전쟁의 풍운을 겪어 봤던가.
하루아침에 비천한 포로가 되어
내 용모는 까칠하고 추하게 되었구나.
태묘를 떠날 때 가장 상심했으니
악대의 슬픈 이별곡(離別曲)에
궁녀 앞에서 눈물을 쏟았네.
남당의 신하였던 장계와 서현은 이욱이 남당을 그리워하는 시를 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은 송태조가 책망하지 않을까 가슴을 조였다.
그런데 조광윤은 애수에 젖은 시에 감화되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은 정말 한림학사에 못지않네. 너무 상심하지 마시게. 짐(朕)은 당신들을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거요.」
조광윤은 남당왕 이욱이 금릉성을 떠날 때의 슬픈 광경에 대해 이해했다.
조광윤은 오대십국 시대의 전란 중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천하통일을 결심했고, 이를 위해 부득이 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그런데 천하를 도모하려는 그가 또 무엇 때문에 전쟁을 두려워했는가? 왜 초(楚)나라의 항우(項羽)나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처럼 과감히 죽이고 정벌하지 못했는가?
그의 이러한 행위의 사상적 근원은 도가(道家)사상에 바탕을 두고 “살인을 낙(樂)으로 삼는 자는 천하를 도모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다섯 나라를 소멸했지만 왕은 어느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후대했다.
승리를 거둔 후 조광윤은 형남왕 고계충을 절도사로 임명하고, 호남왕 주보권은 상장(上將)으로 임명하고, 후촉왕 맹창은 국공(國公)으로 봉하고, 남한왕 유창은 은사후(恩赦侯)로 봉하고, 남당왕 이욱은 한림(翰林)이라 불렀다. 실로 천하가 태평무사하고 천하가 심복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송태조 조광윤이 서경(西京) 낙양(洛陽)을 순찰할 때 성안의 백발노인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린 자가 많았다고 한다.
「내가 동란(動亂)과 이산(離散)의 유년시절을 겪었다면, 오늘은 뜻밖에 태평 황제의 어가행렬을 보게 되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