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21)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7.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과는 신뢰관계 유지

 

조광윤은 작은 나라에 대해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점령할 것을 주장했고, 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귀순하면 작위(爵位)를 주어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했으며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았다.

다투지 않는 덕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며 하늘의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이 바로 그가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오월(吳越)에 대한 기본책략이었다. 오월은 중원왕조에 대해 항상 공손하고 조신한 태도를 취했다.

송조(宋朝)가 건립된 후 오월왕 전숙(錢俶)은 즉시 송조에 귀순했고, 송태조 조광윤은 그를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로 봉했다. 중원의 송조가 갈수록 강대해짐에 따라 강남의 대부분 정권은 송조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런데 오월왕 전숙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욕심이 없었고 “욕심이 없으면 무해 무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그를 믿었고 오월정권은 굳게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오월국의 내부에도 전숙이 송조를 돕는데 대해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승상(丞相) 심호자(沈虎子)가 간언을 올렸다.
「강남의 오월은 하나의 엄연한 나라입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그 격을 낮추고 계시는데 어떻게 사직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오월왕 전숙이 대답했다.
「우리는 송조와 한 식구이고 오월은 송조의 번진이요. 송조정의 비호가 있는데 뭘 지킨다고 운운하는 거요?」
그는 오히려 심호자의 재상직을 파면했다. 외부사람이 봤을 때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실정을 보면 이것은 아마 조광윤의 독특한 매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경』은 이렇게 말했다. “대국은 소국들을 합병하려 할 따름이고, 소국은 대국 사이에서 생존하려 할 따름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월은 송나라의 10분의 1도 안되는 소국이기 때문에 송나라에 귀속되는 것을 스스로 달가워했고, 송태조 조광윤의 뜻대로 움직였으며 이점이 바로 ‘천지(天地)의 정수(定數)’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오월은 오대십국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존속했던 나라로서 70년 동안 전쟁 없이 백성들은 안정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송나라가 남당공격을 개시한 후 전숙은 군대를 이끌고 남로(南路)에서 상주(常州)를 공략하여 변경(汴京)에 승전보를 전했다.

조광윤은 전숙에게 큰 상을 내려 송나라 태사(太師)와 상서령(尙書令)에 봉했다. 또한 그의 안전문제를 걱정해 왕이 친히 출전하지 말고 귀국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오월왕은 자신에 대한 조광윤의 관심과 배려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조광윤은 병권을 대장군 심승례(沈承禮)에게 넘기고 전숙은 오월군을 통솔해 송군을 따라 윤주(潤州)로 진군하며, 심승례에게 남당의 도성 금릉에 대한 포위전을 수행하도록 명했다.

『도덕경』은 말했다. “바로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능히 그와 비길 자가 없다. 곡선(曲線)은 원(圓)을 만들 수 있다.” 전숙은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난세에 남과 다투지 않고 달갑게 조광윤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동원해 도왔다. 오월왕 전숙과 남당왕 이욱은 같은 입장에 처해 있었지만, 각기 다른 두 인격에 의해 각기 다른 행동을 취했고, 각기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약소국 군주가 강대국에 굴복해야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외부의 압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월의 전숙과 남당의 이욱의 행동은 둘 다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전숙이 진심으로 송나라를 섬기는 것을 굴복한다고 말할 수 없고, 남당이 자신의 생존권을 고집하면서 “옥(玉)이 되어 부서질지언정 기와가 되어 보전하려하지 않는 것”도 비난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남당을 평정하고 있을 즈음, 조광윤은 오월왕 전숙에게 하교를 내렸다.
「원수께서 비릉(毗陵)을 공략해 큰 공을 세웠으니, 남당을 평정하면 잠시 오셔서 짐(朕)과 만나 서로 위로의 환담을 나눕시다.」

전숙은 신하로서의 위치를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번 소환해도 조정에 황제를 알현하러 가지 않았던 남당의 이욱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체의 꿍꿍이속이 없는 전숙은 남당이 평정되면 상경해 조광윤을 알현하기로 했다. 남당이 평정되자 전숙은 즉시 축하문을 보내고 또 스스로 변경에 가서 조현(朝見) 조현(朝見):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던 일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송태조 조광윤이 죽던 해인 976년(태조17) 2월에 전숙은 송나라의 변경(汴京)으로 떠났다.

그에게는 어떤 사욕이나 지나친 욕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고 가는 도중 내내 산수를 즐기고 남북의 색다른 풍경을 감상했다. 변경에 도착한 후 남북의 각기 다른 풍토와 생활상을 보고 그는 몹시 즐거워했다.
 
입조한 후 그는 마치 송조의 외지에서 근무하는 지방관리와 같았고, 일국의 군주로서의 교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세운 공에 의해 그를 왕으로 봉했고, 그의 아내 손씨(孫氏)도 오월국의 왕비로 책봉했다.

각국의 군주 중에서 전숙은 최고의 작위를 받았다. 이는 실로 “타인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능히 그와 비길 자가 없음”을 말해준다.

 

오월왕 전숙이 아직 변경(汴京)에 있을 때, 천하는 통일을 이루고 오직 오월과 북한만이 독립국가로 남아 있었다.

송조의 여러 대신들은 오월왕이 이미 변경에 와 있으니 그를 억류하고 절대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송태조 조광윤에게 올렸다.

그러나 도의를 신봉하고 천하의 이치를 중시하는 조광윤은 옛 성현의 “다투지 않아도 능히 승리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능히 호응을 받을 수 있으며, 소환하지 않아도 스스로 온다.”는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억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빨리 오월국으로 돌아가도록 재촉했다. 변경에서 오월국에 돌아온 전숙은 천하가 이미 평정되고 사해가 하나로 귀결된 것을 보고 군대를 해산하고 성루를 제거해 송조의 지방관리 신분으로 오월을 다스려 나갔다.

송태조 조광윤이 죽은 지 2년 만에 978년(태종3) 5월 태종 조광의의 명령을 받고서야 변경으로 가서 직무를 수행했다. 988년(태종13)에 전숙은 60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의 각 정권을 살펴보면, 어떤 나라는 40여 년간 존속했고, 어떤 나라는 3년 밖에 존속하지 못했는데, 유독 오월정권만 오대(五代)에 거쳐 70년간 존속했다. 전숙만 하더라고 30여 년간 통치하면서 전란을 겪지 않았고, 오월의 백성들은 안정적이고 부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전숙은 정치적 야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웃의 남당과 동맹을 맺지 않았던 것이었다.

두 번째 원인은 사이좋게 처세하고 ‘다투지 않는 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투지 않는 덕’을 갖고 있자면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하나는 상대방이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고 대세를 얻은 현명한 황제이어야 한다.

그래야 다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투어도 쓸데없고 다투면 필히 멸망하게 되는 경우다.

오월왕 전숙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송태조 조광윤의 덕목의 작용이 가장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