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25)

제4절 송태조의 고려(高麗)에 대한 외교정책

송태조 조광윤은 개국 초기에 두 이씨(李氏)의 반란을 진압하고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통해 황권에 위협이 되는 금군(禁軍) 고위장군들의 병권을 회수하는 등 내정(內政)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눈길을 나라 밖으로 돌려 동방의 고려(高麗)와 선린우호관계를 가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962년(태조3)에 그는 좌효위대장군(左驍衛將軍) 석희(石曦)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국교수립 의사를 전달했다. 고려 광종 왕소(王昭)는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같은 해 답례로 이흥우(李興祐)를 송(宋)에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비로소 양국 간에 국교(國交)가 시작되었다.

 

고려 광종은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후주(後周)가 건국되자 그때까지 자체적으로 써왔던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없애고, 951년(후주태조1, 고려광종2)부터 후주(後周) 태조의 연호 ‘광순(廣順)’에 이어 세종의 연호 ‘현덕(顯德)’을 사용해왔었다.

그러나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그동안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터라, 광종은 다시 ‘광덕(光德)’이라는 이전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962년 송태조 조광윤이 고려는 ‘동방의 군자의 나라’라고 존중하면서 우호의 뜻을 담아 사신을 보내 국교수립을 요청하자, 광종은 이에 감응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그 이듬해(963년: 송태조4, 고려광종14) 12월부터 송태조의 두 번째 연호 ‘건덕(乾德)’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와 고려의 북방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거란(契丹)은 두 적대국인 송나라와 고려가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일시에 남서쪽과 남동쪽으로부터 협공 당하는 형국에 놓이게 되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거란은 양국 간의 육로통행을 차단하고 고려에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거란의 방해작전으로 인해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트기는 하였지만, 965년에 한 번 더 외교사절을 교환한 이후 거의 10년 동안 단교상태에 가까워서 실질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서 고려 광종은 그동안 양국 간의 소원했던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972년(송태조13, 고려광종23) 1월, 내의시랑(內議侍郞) 서희(徐熙) 서희(徐熙: 942-998): 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42년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이 되었다. 거란 침 입시 세치의 혀로 물리치고 강동6주를 지켜내서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당시의 부득이 했던 사정을 설명하고 양국 간 외교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해 송나라의 이해를 구하도록 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고려가 그동안 거란과 친교관계를 맺고 송나라와는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황해를 건너 먼 뱃길을 온 고려사신 서희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막상 서희를 만나보니, 준수한 용모에 공손하면서도 양국이 그동안 소원했던 저간의 사정을 이로 정연하게 설명하는 비범한 모습에 감탄했다.
 
서희는 고려가 송나라와 그동안 활발한 외교관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양국을 갈라놓고 있는 거란과 여진(女眞)의 방해로 부득이 했다는 점을 소상하게 피력하였다.

조광윤은 그의 말을 듣고 마침내 오해를 풀고 양국 간에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재개하였으며, 조칙(詔勅)을 내려 고려 광종에게 식읍(食邑)을 더해 주었다. 조광윤은 그에게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반듯하다."며 비록 명예직이지만 지금의 국방부차관에 해당하는 ‘검교병부시랑(檢校兵部侍郞)’ 일부 기록에서는 송태조 조광윤이 서희에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병부상서는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벼슬로서 외국인에게 쉽게 내릴 수 있는 직책이 아니며, 중국의 각종 자료에서는 명예직인 차관급의 ‘검교병부시랑(檢校兵部侍郞)’으로 기록하고 있다.

의 벼슬을 하사했다. 원래 인재 등용이라면 만사를 제쳐놓았던 조광윤은 서희의 됨됨이에 반해 송나라에 남아 계속 일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그는 예의바른 태도로 완곡하게 거절하고 고려로 돌아왔다.

 

고려로 돌아온 그는 관직에서 승승장구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까지 벼슬이 올랐으며, 특히 993년(성종12) 거란장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의 북진정책과 고려가 송나라와 국교를 맺은 것을 트집 잡아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거란이 그대로 물러가게 한 일은 우리 외교상의 쾌거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