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윤은 봉건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늘아래 둘도 없는 고귀한 신분인 황제였지만, 그는 한 인간으로서 부모에게는 출천대효의 효자였으며, 형제자녀들에게는 훌륭한 가장이었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제왕이었다. 그는 후주의 장군시절이나 황제가 된 이후에도 언제나 검소하고 청렴하였다. 측근에게 마음을 열고 온정을 베풀어 많은 인재들이 몰려와 그를 도움으로써, 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마침내 지고지상의 황제까지 되었다. 나아가 3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는 굳건한 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찬란한 송대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다만, 매사에 철두철미했던 그도 천려일실(千慮一失)로 동생을 너무 믿었던 까닭에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의문에 가려진 죽음을 당하고 직계후손들까지 핍박받았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1. 무장출신의 아버지 조홍은(趙弘殷)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용맹하고 날랬으며, 달리는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쏠 정도로 말타기와 궁술에 능했다.
무인이 득세하던 당말(唐末: 899년)에 태어나, 오대시기에 성장한 그는 문관이었던 선조들과는 달리 당시 무인집권시대의 세상흐름에 따라 무관이 되었다.
그는 강직하고 과묵한 무장으로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다가 후일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그다지 두드러진 존재는 아니었다. 후일 송태조 조광윤에 의해 ‘선조(宣祖)’로 추존되었다.
조홍은은 당나라 말기에 진주(鎭州)군벌 조왕(趙王) 왕용(王鎔)의 휘하에서 무장으로 있었다.
이존욱이 후당을 세우기 전에 왕용을 도와 후량의 주전충과 맞서 싸울 때, 그는 왕용의 명을 받아 오백 기마병을 이끌고 위기에 처했던 이존욱을 구해주었다.
장종으로 등극한 이존욱은 그를 총애했으며, 그의 용맹함을 높이 사서 비첩지휘사(飛捷指揮使)로 임명하고 황궁수비군인 금군의 한 부대를 맡도록 했다.
그러나 장종은 등극한지 3년 만에 양자 이사원(李嗣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총애하던 배우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고, 이사원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명종 즉위 후 조홍은은 조정으로부터 냉대를 받아 조광윤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다. 조홍은의 지위는 후당에서 후진, 후한, 후주의 4대 왕조에 이르는 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금군의 중급무장으로 있었다.
왕조가 수시로 바뀌고 권력관계가 무상하게 바뀌던 시절에 조홍은의 평범했던 지위가 오히려 그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던 셈이다.
그가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후한 말 은제(隱帝) 초에 일어난 세 절도사들의 반란 때부터였다.
그는 후일 후주를 세운 추밀사 곽위를 따라 왕경숭의 반란을 토벌하는 진창(陳倉)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왼쪽 눈을 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적을 쫓아가 패퇴시켜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후한의 호성도지휘사(護聖都指揮使)로 승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위가 후주의 태조로 즉위하자 그는 철기제일군(鐵騎第一軍)도지휘사로 승진했다. 956년(세종3) 그가 우상도지휘(右廂都指揮)와 악주방어사(岳州防禦使)로 있을 때 세종을 따라 남당의 회남(淮南) 정벌에 참전해 양주를 공격할 때에도 공을 세웠다.
이때 조광윤은 고평전투 이후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승승장구해 30세에 이미 아버지보다도 훨씬 높은 지위에 있었다. 흥미로운 일은 송태종 조광의의 회고담에 의하면, 양주성을 공격할 때 조홍은은 두 아들 조광윤과 조광의와 함께 3부자(三父子)가 나란히 전쟁터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조광의는 소년티를 채 벗어나지 못한 불과 18세의 어린 청년이었다.
양주성을 공격할 때 조홍은의 인간성이 후덕했음을 드러내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양주성을 함락한 후 그가 부하들에게 일체의 약탈을 금지시켜 성내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고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칭찬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세종이 양주성 함락 후 저잣거리를 순시할 때 조홍은이 수행했다고 한다.
세종이 어느 떡집에서 떡을 사 먹었는데, 파는 떡이 너무 작고 얇아서 화를 내면서 일하는 사람 10명을 잡아서 죄를 묻고 죽이려 하자 그가 나서서 용서를 청해 모두 풀어주었다고 한다. 조광윤이 등극한 후 정권교체작업을 할 때 이전 왕조의 황족들과 신하들에 대해 후하게 관용을 베풀었는데, 이는 아버지 조홍은으로부터 유전적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조홍은이 양주성을 공격할 때의 또 다른 에피소드로, 장군시절 조광윤은 부자지간(父子之間)에도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했음을 엿볼 수 있다. 양주성에 진입한 조홍은은 오래지 않아 병에 걸려 먼저 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조광윤은 남당의 군사요충지 저주(滁州)를 함락한 후 조정에서 아직 관리를 파견하기 전이므로 그가 임시로 저주를 수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홍은은 1개 부대를 이끌고 양주에서 출발해 한밤중에 저주성 밑을 지나갈 때, 아들 조광윤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반가워서 성문 앞에 다가가 성문을 열라고 호령했다.
그는 당장 성 안에 들어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부자간의 상봉,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의 만남은 더욱 뜨겁고 더욱 간절할 것이었다. 아들이 성문을 열고 아버지를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절대 사적인 것 때문에 군문의 규율을 위반하지 않았다.
그는 저주성 성문 위에 서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허물이 없지만, 한밤중에 성문을 여는 것은 왕조의 대사이므로 소자는 감히 마음대로 성문을 열 수 없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뒤에야 열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충성과 효도 양쪽을 다 원만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왕조의 일에 최선을 다하려면 친인과의 정분은 한편에 제쳐 놓고 왕조의 일에만 전념해야 했다. 조광윤은 준엄한 군율을 이유로 아버지를 한밤중에 성문 밖에 그냥 있게 하였다.
그도 물론 아들의 이러한 처사는 군기(軍紀)가 엄정하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원망하지 않았다.
성 밖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아서야 입성하고 비로소 아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장기간 전장에서 싸워온 조홍은은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쳐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달래면서 추운 밤에 성 밖에서 노숙을 하고 입성한 후 그만 몸져눕게 되었다.
조광윤은 응당 저주에서 아버지의 병치레를 돌보아야 했지만, 전쟁상황이 긴박하고 수주성을 아직 공략하지 못했고 또 연기를 하려면 끝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아버지와의 사사로운 감정을 포기하고 병사를 이끌고 수주성으로 달려가 세종과 합류했다.
그때 조광윤은 촌음을 다투어 전쟁터를 옮겨야 했으므로, 저주의 군사판관으로 부임한 조보(趙普)에게 아버지의 간호를 맡기고 홀홀히 그곳을 떠나갔다.
그러나 조홍은은 병상에 누워 조보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2개월 후에 죽었다. 이로써 조홍은은 아들이 황제가 되기 4년 전 956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후일 이것이 인연이 되어 조광윤은 자기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조보를 ‘장형(長兄)’이라 부르며 깊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었고, 마침내 조보는 송나라의 ‘10년 명재상’을 지내게 되었다.
조광윤의 공사가 분명한 처사를 전해들은 세종은 충성심에 감동되어 그를 전전도우후에서 조광윤의 공사가 분명한 처사를 전해들은 세종은 충성심에 감동되어 그를 전전도후에서 광국군절도사 겸 전전도지휘사로 승진시켜 주었다. 광국군절도사(匡國軍節度使)는 기록에 따라 '정국군절도사(定國軍節度使)' 또는' 동주절도사(同州節度使)'라고도 되어 있다. 그리고 죽은 조홍은은 무청군(武淸軍)절도사 겸 태위(太尉)에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