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20)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 5개국 평정 후 거대한 영토와 인구 획득

 

송태조 조광윤은 즉위 초부터 선남후북정책을 채택하고 중국통일대업을 개시하여 12년 동안 형남, 호남, 후촉, 남한, 남당 등 5개국을 평정함으로써, 통일계획의 90% 이상을 달성했다.

북쪽의 조그만 땅 북한만을 남겨놓았고, 오월(吳越)과 장천(漳泉)은 스스로 송나라에 복속하였다.

 

963년(태조4) 2월, 호남 가는 길을 빌려 형남(荊南) 형남(荊南): ‘남평(南平)’ 또는 ‘남평국(南平國)’이라고도 한다.
을 평정했다. 이때 송군(宋軍)은 활 한대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릉을 점령했다.

형남왕(荊南王) 고계충(高繼冲)은 3개 주, 17개 현, 14만 3,300세대를 송나라에 바치고 왕권을 양도했다.
 
963년(태조4) 10월, 호남(湖南)을 공격해 호남왕(湖南王) 주보권(周保權)의 항복을 받아내고 14개 주, 1개 감(監), 66개 현, 9만 7,000여 세대가 송나라에 귀속되었다.

965년(태조6) 1월, 후촉(後蜀) 정벌을 개시하고 66일 만에 후촉왕(後蜀王) 맹창(孟昶)의 투항함으로써, 송나라는 후촉의 46개 주, 240 현, 그리고 53만 4천여 세대를 귀속시켰다. 971년(태조12) 1월, 남한왕(南漢王) 유창(劉鋹)은 남한의 60개 주, 214개 현, 17여만 세대를 송나라에 헌납하고 투항했다.

975년(태조16) 11월, 남당왕(南唐王) 이욱(李煜)은 19개 주, 3군, 108개 현, 65만 5천여 세대를 송나라에 바쳤다. 이로써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모두 5국(國), 142주(州), 1감(監), 3군(郡), 645현(縣), 144만 6,300여 세대(世帶)의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획득했다.

 

6. 강적 거란에 대한 ‘선선린후평정(先善隣後平定)’ 전략

 

나라와 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생기면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외교수단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전쟁을 택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나라의 존엄과 관련된 문제라면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지만, 기타 문제는 외교담판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외교담판은 돈문제와 직결되는데 수지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잘 따져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은 전쟁을 하려면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며 장병과 백성들의 귀중한 생명은 돈으로 따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거란은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하여 일어선 발해(渤海)를 무너뜨리고 만주벌판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혼란에 빠진 북중국을 기마군단으로 유린하고 연운16주에 강대한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이 남방과 서방의 여러 나라를 통일하고 이제 남은 것은 조그마한 북한과 강대한 거란뿐이었다.

거란에 대하여는 후주 세종이 정벌을 시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갑자기 얻은 병으로 중단되는 바람에 그 숙제는 고스란히 조광윤에게 넘겨졌고, 중국을 통일하려는 그에게는 가장 강력한 위협세력이었다.

937년, 석경당이 후당을 멸하고 후진을 건국하는데 도와준 대가로 거란이 빼앗아간 조광윤의 본향 탁주(涿州), 조보의 본향 유주(幽州)를 포함한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되찾기 위해 조광윤도 “군대를 동원할 것이냐? 아니면 돈으로 해결할 것이냐?” 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쳤다.
 
남당 문제가 해결되고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나라는 한동안 태평무사한 나날을 보냈지만 북방의 거란은 여전히 위협적 존재로 남아 있었다.

조광윤은 빼앗긴 땅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결심했으나, 한편으로 백성의 생명을 잃는 것이 안타까워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최소한의 대가로 옛 땅을 회복하면서 평화를 이루려고 했다.

 

969년(태조10) 북한을 공격했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오던 중 송태조 조광윤이 전주(澶州)에 당도했을 때 마침 황하의 제방이 터졌다.

조광윤은 장군 조한(曹翰)에게 북한에서 항복한 병력을 이끌고 강둑을 막도록 명했다.

조한은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 은자를 포상금으로 내놓으며 사랑하는 백마를 강에 던짐으로써, 장병이 하나가 되어 터진 황하제방을 막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조광윤은 그에게 ‘지용무쌍(智勇無雙)’이란 칭호를 수여했다.

조한은 황하홍수를 정복한데 영감을 얻어 조광윤에게 ‘유주토벌전략도(幽州討伐戰略圖)’를 제출하고 거란과 전쟁을 벌여 결판을 내겠다고 했다. 조광윤은 재상 조보를 불러 그 전략도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이 지도를 제출한 당사자를 모르고 자세히 들여다보던 조보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 지도를 만든 사람은 조한이 틀림없습니다!」
조광윤이 물었다.
「재상은 어떻게 조한이라는 걸 알았소?」
조보가 말했다.
「현재 장수들 가운데서 이런 책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조한 외에 다른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조광윤이 말했다.
「맞는 말이오. 이 지도는 조한이 제출한 것이오. 재상이 보기에 이 책략이 어떻소?」
조보가 말했다.
「이 전략도를 보면 조한을 파견하면 반드시 유주(幽州)를 공략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주를 공략한 후 폐하는 조한을 교체할 사람으로서 누구를 파견할 것입니까? 조한은 비록 유주를 공략할 지략이 있지만, 유주를 지켜나갈 대책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에 조광윤은 동의하면서 말했다.
「거란에 대해서는 다른 대책을 강구해봐야겠소. 짐(朕)은 유주성(幽州城)을 지키겠다고 장병들의 생명을 바치고 싶지는 않소.」

지난 10년 동안 연이어 통일전쟁을 해온 송나라가 많은 나라에 대해 피를 흘리지 않고 책략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치열한 전투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전투과정에서 쌍방은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조광윤은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장병들과 신하, 백성의 생명을 아낄 줄 아는 제왕이었다.

조광윤은 조한의 건의가 있었지만, 강남에서의 승세를 타고 거란을 대거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거란 상황에 대해 전쟁을 하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계략을 찾아보기로 했다.

사실 조광윤은 10년 동안 형남, 호남, 후촉, 남한, 남당을 평정하여 많은 재물을 축적했기 때문에 북방의 거란과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국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의 군량은 미리 비축하되, 전쟁이 터진 다음에 백성에게서 많은 것을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공물과 세금의 수납기관인 좌장고(左藏庫) 외에 강무전(講武殿) 뒤에 따로 ‘봉장고(封欌庫)’라는 창고를 설치해 연간 금은, 비단의 여유분을 비축하도록 했다. 일부 조신들은 조광윤이 봉장고를 설치한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송태조 조광윤이 설명했다.
「석경당 연운16주를 거란에 넘겨줘 그 곳 백성들이 국경 밖으로 밀려났으니 짐(朕)은 실로 가슴이 아프오. 봉장고에 재물이 삼십만에서 오십만 정도가 축적되면 이것으로 거란과 계약을 맺어 땅을 백성들에게 되찾아 주는데 충분할 것이오.

만일 저들이 거부한다면 이 재물로 용사들을 징모해 공략할 생각이오.」
이와 같이 조광윤은 거란에 대해 군사적으로 먼저 방어조치를 취했다.
그는 일찍이 북방수비군으로 파견되어 가는 장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와교(瓦橋) 일대에 남북 분계지점이 있으니 거기에 느릅나무를 심되 간격은 말 한 필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게 하라.」
남북분계선의 광활한 지대에 빨리 자라는 느릅나무를 대규모로 심어 거란 기마병의 남침을 저지하자는 의도였다.

 

974년(태조15) 11월에 거란의 탁주(涿州)자사 야율종(耶律琮)이 송나라 웅주(雄州)의 권지(權知) 손전흥(孫全興)에게 서신을 보내 왔다.

「저는 거란군주의 은혜를 받아 국경에서 잡일을 맡아보는 사람입니다. 또한 저는 국경 밖과 알력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단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공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남북 두 지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래 같은 곳이었는데 어찌 서로 동맹을 맺고 화폐를 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후진왕조는 정권싸움이 잦고 주먹 센 신하가 권력을 휘둘러 대의를 잃게 했으며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고난 속에서 허덕이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 거란과 송나라 이 두 왕조는 본래 아무런 알력이 없습니다.

이제 서로 외교사절을 통해 두 군주의 마음을 서로 전달하고 피폐해진 백성의 마음을 달래고 다시 우호관계를 맺어 오래도록 좋은 이웃나라로 살아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관록이 높지 않은 신분이나 감히 이런 뜻을 전하오니 널리 혜량하시고 결론을 내려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서신은 거란 탁주(涿州)자사의 명의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응당 거란왕의 사주를 받아 쓴 것이고 거란이 적극적으로 송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는 정보로 보아야 했다. 

서신을 받은 손전흥은 지체하지 않고 변경(汴京)으로 가서 송태조 조광윤에게 보고를 올렸다.

서신을 통해 거란도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조광윤은 급히 야율종에게 회신해 송조의 태도를 분명히 표명하도록 손전흥에게 명하고, 두 나라의 우호관계 수립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975년(태조16) 3월 거란에서 먼저 외교사절 극묘골신사(克妙骨愼思)를 송나라에 파견했다. 그해 7월에 송조(宋朝)에서도 학숭신(郝崇信)과 여단(呂端)을 거란에 외교사절로 파견했다.
 
이로부터 송조와 거란의 우호관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조광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년 남짓 유지되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연운16주의 수복문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그 문제를 의사일정에 올려놓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윤이 임종하던 976년(태조17)에 신하들이 ‘태평통일(太平統一)’이라는 황제의 칭호를 붙여 주려고 하자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연진(燕晋)이 수복되지 않았는데 어찌 ‘태평통일’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가?」

조광윤은 시기를 기다렸다가 반드시 일거에 거란을 멸망시키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