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청렴한 장군, 검소한 황제▶ 아우 조광의(趙光義)에게 검소함을 가르치다 조광윤은 동생 조광의에게 전전도우후, 변경윤 등의 높은 지위와 직권을 부여해 주었으나, 형으로써 동생에 대한 가르침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때인가 한번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조광의가 송태조의 의상이 너무 수수한 것을 보고 형에게 말했다. 「황제의 의상은 화려해야 존귀한 신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광윤은 동생이 사치와 음란한 생활에 물들지 않을까 깊이 우려했다. 그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아무리 수수하게 입는다 해도 일반 백성들보다 백배 화려할 것이다. 후촉왕 맹창이 나라를 잃은 원인은 바로 음란하고 사치한 생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요강마저도 보물로 여기고 장식용으로 달고 다녔다. 이러한 자가 어떻게 멸망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우리 황실 사람들은 평민보다 조금만 더 잘 입으면 된다. 구태여 화려함을 추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광의야, 너는 우리가 협마영에 있을 때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벌써 잊었느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것은 그때보다 훨씬 화려하니라.」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탄복한 조광의는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조명과 하버브리지에서의 불꽃놀이가 한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당링하버의 야경 ▲ <사진=시사1 조병세 논설위원장> 왓슨베이 절벽과 밀려오는 파도를 감상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이다.
제2절 청렴한 장군, 검소한 황제2. 검소함을 몸소 실천한 황제 조광윤은 어린 시절의 스승 신문열이 청빈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아 황제가 된 이후에도 금붙이가 붙은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를 일체하지 않아 역대 어느 황제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어좌(御座), 황관(皇冠), 어의(御衣), 어가(御駕)도 금붙이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황관(皇冠)의 경우, 황금으로 만들지 않고 선비들이 쓰는 모자의 옆머리에 신하들보다 긴 검정 막대기만 매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의 후대 황제들은 모두 태조 조광윤이 썼던 모양의 검소한 황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황후와 자녀들에게도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인 조광의와 조정대신들에게도 검소함을 근본으로 삼고 사치를 버리도록 권유했다. 중국 통일전쟁에서 여러 차례 대승을 거둔 송나라는 조정에서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건륭(建隆), 건덕(乾德), 개보(開寶) 등 세 차례 연호를 바꿀 때에도 축하행사를 일체 거행하지 않았다.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히 살며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합된 모습이었지만 태평성세
제2절 청렴한 장군, 검소한 황제1. 청렴한 장군 조광윤 조광윤은 후주 세종이 회남출정을 시작한 때부터 줄곧 거침없이 성을 공략하고 땅을 획득했다. 남당왕 이경(李璟)은 그가 누차 전공을 세우고 명성이 남당조정을 뒤흔들어 놓자 이간계(離間計)를 쓰기로 했다. 그는 몰래 사람을 보내 조광윤을 찾아가 백은(白銀) 3천 냥을 건네고 고관대작과 높은 녹봉을 약속한 편지를 전했다. 이로써 세종과 조광윤의 군신관계를 이간질하려 했다. 그러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조광윤이 어떻게 이런 일로 큰일을 그르치겠는가? 그는 “금은보화가 한집안 가득 있다 해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한 『도덕경』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으므로, 추호도 흔들림 없이 뇌물을 모두 후주의 국고에 상납하고 이 일을 세종에게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조광윤은 어떤 경우라도 남의 것을 거저 손에 넣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후주군의 대장군이 되고 또 수많은 적의 도성을 공략하고 땅을 탈환했으나 얻은 재물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타는 말에 채울 안장과 입는 옷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다. 뿐만 아니라 『송사(宋史)』「장영덕전(張永德傳)」에 따르면, 첫째부인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9. 조광윤의 후손 송태조 조광윤의 직계후손들은 북송(北宋)시기에는 아무도 황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광윤이 ‘촉영부성(燭影斧聲)’ 즉 ‘촛불 흔들리는 그림자에 도끼소리’라는 역사의 수수께끼를 남기면서 갑자기 죽은 후에 동생 조광의(趙光義)가 황위를 물려받아 송태종이 되었고, 그 이후는 모두 태종의 직계 후손들이 계속해 황위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다만 금(金)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운 후 첫 번째 황제가 아들이 없자, 그 이후 8명의 황제들은 모두 조광윤의 두 아들 덕소와 덕방의 후손들이 황위를 이어 받았다. 덕방(德芳)의 후손들이 남송 초기에 먼저 4대를 황제노릇을 하고, 남송 말기에 덕소(德昭)의 후손들이 4대에 걸쳐 황위에 올랐다. ▶ 차남 조덕소(趙德昭)의 후손 차남 조덕소는 951년에 태어나서 979년(태종4)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숙부 송태종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동안희정왕(同安僖靖王) 및 위왕(魏王) 조유정(趙惟正), 차남은 남양강효왕(南陽康孝王) 및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 3남은 서국공(舒国公) 조유고(趙惟固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6. 조광윤의 형제 조홍은은 광제(匡濟) 광제(匡濟):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 난 후 광제(光濟)로 바꾸었다. , 광윤(匡胤), 광의(匡義), 광미(匡美), 광찬(匡贊) 광찬(匡贊):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 난 후 광찬(光贊)로 바꾸었다. 등 5명의 아들과 연국공주(燕國公主)와 진국공주(陳國公主) 등 2명의 딸을 두었다. 맏아들 광제와 막내아들 광찬이 일찍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조광윤은 차남이지만 실제로는 장남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광미는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는 서자(庶子)라고 한다.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에 일찍 죽은 형 광제는 옹왕(邕王)으로, 막냇동생 광찬은 기왕(夔王)으로 추봉(追封)했다. 조광윤은 부모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따뜻한 우애를 유지했기 때문에 역대 제왕 중에서 제일 모범적으로 가족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은 맏형으로서 형제들 간에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도록 애썼다. 조광윤의 바로 아래 동생 조광의는 후일 태종이 되었는데 그보다 12살이나 적은 ‘돼지띠’ 띠동갑이었다. 둘째 동생 조광미는 그보다 21살이나 어려서 그의 아들뻘이 되는 셈이다. 조광윤의 살아남은 형제로는 조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조광윤의 4남 덕방(德芳) 4남 덕방(德芳)은 조광윤이 황제에 오르기 1년 전 959(세종6)년에 태어나 형 덕소보다 여덟 살 아래였다. 그리고 그는 981년(태종6) 뚜렷한 병명도 없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병사했다. 왕황후가 낳은 아들 덕방은 4남이지만 하황후가 낳은 덕소에 이어 차남 노릇을 했다. 조광윤이 죽던 해인 976년(태조17), 덕방이 18세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 귀주(貴州)방어사의 관직을 내렸다.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紀聞)』에 의하면, 송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송황후는 급히 내시 왕계은(王继恩)에게 진왕(秦王) 덕방에게 입궁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왕계은은 덕방을 부르지 않고 진왕(晋王) 조광의(趙光義)에게로 급히 달려가서 송태조의 죽음을 알렸다고 한다. 이로써 세인들은 태종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형 송태조를 계획적으로 죽였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광의는 976년 11월 태종으로 즉위한 후 바로 덕방을 흥원윤(興元尹), 산남서도(山南西道)절도사, 동평장사(同平章事)에 봉했다. 978년(태종3) 겨울, 태종은 덕방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 직을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5. 조광윤의 자녀 조광윤은 4남 6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2남 3녀만 살아남았다. 첫째부인 하황후는 장남 덕수(德秀), 차남 덕소(德昭), 3남 덕림(德林)을 낳았으나 장남과 3남이 일찍 죽는 바람에 차남 덕소가 장남 노릇을 했다. 하황후는 소경(昭慶)공주, 연경(延慶)공주, 영경(永慶)공주를 두었다. 둘째부인 왕황후가 낳은 4남 덕방(德芳)은 차남 노릇을 했고, 신국(申國)공주와 성국(成國)공주, 영국(永國)공주는 모두 일찍 죽었다. ▶ 조광윤의 차남 덕소(德昭) 하황후가 낳은 장남 덕수(德秀)가 요절해 차남 덕소가 장남 노릇을 했다. 공교롭게도 덕소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차남이었지만 장남이 일찍 죽자 장남 노릇을 한 것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덕소는 곽위가 후한의 은제를 몰아내고 후주를 세웠던 951년에 태어나 조광윤이 죽은 지 3년 되던 해 979년(태종4)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해 세상을 떠났다. 덕소가 태어날 때는 조광윤이 유랑생활을 마치고 950년 곽위 휘하 부대에 말단 병사로 입대해 곽위가 후주의 황제가 되는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중앙의 금군으로 발탁된 해였다. 인간 조광윤으로 말하자면 덕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출천대효(出天大孝) 조광윤 조광윤은 부모를 남달리 공경한 효자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했고 결혼한 후에는 아내 하씨(賀氏)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생활했다. 군에 입대하여 전공을 세우고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분가하지 않고 여전히 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95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어머니를 더욱 지극하게 보살폈다. 아내더러 늘 어머니 곁에 있게 하는 외에 자신도 밖에 따로 거처를 두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께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드렸다. 그러므로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도 천하일을 꿰뚫고 있는 두태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조광윤이 어머니를 존경하고 늘 어머니와 감정을 교류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조광윤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황제가 되어서도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고 진심으로 훈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등극한 후 바로 어머니를 태후(太后)로 봉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경우, 등극한 후 5일에 한 번씩 아버지 태공(太公)을 알현했다. 태공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서 황제와 신하간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아들이 황제가 되어도 우울했던 두태후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즉시 조상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어머니 두씨를 황태후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천하의 번진(藩鎭)을 다스리는 일과 비교할 때 이러한 일들은 조광윤가족의 사적인 일들이었지만 봉건 전제사회에서는 가족통치를 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 또한 나라의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태후는 혼란한 시기였던 902년 당소종(唐昭宗) 때 태어났다. 그때 군벌 주전충과 이극용은 잔혹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봉상(鳳翔)으로 도주한 당나라 소종(昭宗)과 비빈(妃嬪)들은 죽이나 떡으로 겨우 끼니를 이었다. 그 밑의 하인들은 매일 굶어서 죽어나갔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당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53년간은 소위 ‘오대(五代)시기’라고 하여 왕조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14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왕조와 황제가 자주 바뀌는 난세 속에서 무인정치에 혐오를 느낀 두태후는 아들이 황제가 된 데 대해서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진교병변 후 조광윤이 황제로 옹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태후가 말했다. 「내 아들은 평소에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과연 황제가 되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