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5)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5. 조광윤의 자녀

 

조광윤은 4남 6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2남 3녀만 살아남았다. 첫째부인 하황후는 장남 덕수(德秀), 차남 덕소(德昭), 3남 덕림(德林)을 낳았으나 장남과 3남이 일찍 죽는 바람에 차남 덕소가 장남 노릇을 했다. 하황후는 소경(昭慶)공주, 연경(延慶)공주, 영경(永慶)공주를 두었다. 둘째부인 왕황후가 낳은 4남 덕방(德芳)은 차남 노릇을 했고, 신국(申國)공주와 성국(成國)공주, 영국(永國)공주는 모두 일찍 죽었다.

 

▶ 조광윤의 차남 덕소(德昭)

 

하황후가 낳은 장남 덕수(德秀)가 요절해 차남 덕소가 장남 노릇을 했다. 공교롭게도 덕소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차남이었지만 장남이 일찍 죽자 장남 노릇을 한 것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덕소는 곽위가 후한의 은제를 몰아내고 후주를 세웠던 951년에 태어나 조광윤이 죽은 지 3년 되던 해 979년(태종4)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해 세상을 떠났다. 덕소가 태어날 때는 조광윤이 유랑생활을 마치고 950년 곽위 휘하 부대에 말단 병사로 입대해 곽위가 후주의 황제가 되는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중앙의 금군으로 발탁된 해였다.
인간 조광윤으로 말하자면 덕소가 태어나던 해는 직장에선 승진하고 집에선 아들을 낳았으니 겹경사가 있었던 해였다.
덕소의 자는 ‘일신(日新)’이며, 964년(태조5) 14세부터 관직을 맡게 되었다. 973년(태조14) 그가 23세 되었을 때 산남서도(山南西道)절도사, 검교태부(检校太傅),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의 작위를 받았다. 사실 중국에서 역대황제들은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왕(王)이나 공(公)으로 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송태조 조광윤은 생각이 달랐다.

「황제의 아들이 아기일 때부터 왕이니 공이니 하는 지위에 봉해지는 것은 옳지 않다. 아무 공적도 없는 어린애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 부하의 고생도 이해할 수 없으며 제대로 자랄 수도 없다. 왕에 봉하는 것은 성인이 되어서 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덕소는 14세, 덕방은 18세가 되어서야 관직을 가질 수 있었다.

 

덕소는 아버지 조광윤을 닮아 성격이 밝고 용감한 젊은이로 무예가 뛰어나고 신하나 병사들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덕소는 조광윤이 갑자기 죽은 다음, 숙부 조광의가 태종으로 즉위하면서 사실상 장남으로서 황제가 되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그는 평소 여간해서 기뻐하거나 화내지 않았으며, 숙부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도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에 대한 인기는 태종보다도 덕소가 훨씬 더 높았던 것이다.
976년(태종1) 태종이 덕소를 무공군왕(武功郡王)으로 봉하고 조회 때 숙부인 제왕(齊王) 정미(廷美) 정미(廷美): 송태조 조광윤과 송태종 조광의의 동생으로 ‘광미(匡美)’ 또는 ‘광미(光美)’라고도 부른다.
와 함께 재상보다 앞에 서도록 배려했지만 내심으로 조카를 무척 경계했다.
979년(태종4) 2월 덕소가 재상 왕부(王溥)의 딸과 또 결혼하자, 태종은 그녀를 ‘한국부인(韓國夫人)’으로 봉했다. 덕소는 무공군왕(武功郡王) 외에 검교태위(檢校太尉)를 추가했다.

 

979년(태종4) 2월, 송태종은 군사를 일으켜 북한의 태원성을 공격할 때 친히 군대를 지휘해 싸움을 주도해 나갔다.
이때 북한왕 유계원이 질겁을 하고 항복하니 북한은 979년(태종4) 5월 멸망했다.
979년(태종4) 6월, 태종은 여세를 몰아 거란의 유주(幽州)정벌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군사들은 북한정벌로 이미 지쳐있었고 전력이 크게 상해 있었다.
태종은 진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사하와 남경에서 잇달아 거란군을 포위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해 7월, 거란의 지원군이 급파되어 하북의 고량하(高梁河)에서 송군(宋軍)은 거듭 참패를 당했다.

송군은 대오가 흩어졌으며 태종은 열세를 면치 못하고 군사를 버린 채 남쪽으로 도망쳤다.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태종이 사라져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되자 장수들은 심히 동요했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이 태종이 죽은 줄로만 알고 덕소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

얼마 후 태종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는 덕소에 대해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

송나라는 비록 거란에 패했지만, 그 이전의 태원성 전투에서 승리해 북한을 평정했다. 북한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으니 마땅히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지만, 태종은 덕소가 황제가 되려했다고 미워하여 일부러 포상을 늦추고 있었다. 장군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덕소는 언제 논공행상을 할 것인지 태종에게 물어보았다.
이때 태종은 대노하며 덕소에게 매우 힐책하는 어투로 쏘아붙였다.

“네가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상을 주어도 늦지 않다!”

덕소는 이 말을 듣고 원통해서 분노해 마지않았다. 그는 그 길로 나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아마도 숙부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수모를 당하는 현실에 대한 울분을 죽음으로써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덕소가 죽자 태종 조광의는 곧바로 덕소의 거처로 달려가서 시체를 끌어안고 거짓 눈물을 보이며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구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겨우 한마디 소리 질렀다고 어찌 이렇게 막다른 길을 택했단 말이냐? 흐흑흑......”
태종은 이미 죽은 덕소에게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을 내리고 위왕(魏王)으로 봉했다.

그리고 시호를 내려 오왕(吳王)으로 봉하고 또 다시 월왕(越王)으로 봉했다. 후일 진종(眞宗)이 즉위해 그에게 태부(太傅)의 관직을 내리고 진종 말기에 다시 태사(太師)로 높였다.

덕소는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유정(惟正),유길(惟吉),유고(惟固),유충(惟忠),유화(惟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