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7)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6. 조광윤의 형제

 

조홍은은 광제(匡濟) 광제(匡濟):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 난 후 광제(光濟)로 바꾸었다.
, 광윤(匡胤), 광의(匡義), 광미(匡美), 광찬(匡贊) 광찬(匡贊):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 난 후 광찬(光贊)로 바꾸었다.
등 5명의 아들과 연국공주(燕國公主)와 진국공주(陳國公主) 등 2명의 딸을 두었다.
맏아들 광제와 막내아들 광찬이 일찍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조광윤은 차남이지만 실제로는 장남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광미는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는 서자(庶子)라고 한다.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에 일찍 죽은 형 광제는 옹왕(邕王)으로, 막냇동생 광찬은 기왕(夔王)으로 추봉(追封)했다. 조광윤은 부모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따뜻한 우애를 유지했기 때문에 역대 제왕 중에서 제일 모범적으로 가족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은 맏형으로서 형제들 간에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도록 애썼다.
조광윤의 바로 아래 동생 조광의는 후일 태종이 되었는데 그보다 12살이나 적은 ‘돼지띠’ 띠동갑이었다.
둘째 동생 조광미는 그보다 21살이나 어려서 그의 아들뻘이 되는 셈이다. 조광윤의 살아남은 형제로는 조광의와 조광미가 있었는데, 조광의는 진교병변을 획책해 형 조광윤을 황제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황위 승계를 둘러싸고 ‘금궤지맹(金櫃之盟)’과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역사의 미스터리를 남겼다.
그래서 조광윤의 동생인 조광의에 대하여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기술하기로 한다.

 

▶ 조광윤의 둘째 동생 조광미(趙光美)

 

조홍은(趙弘殷)의 4남 조광미(趙匡美)는 형 둘이 황제가 되는 바람에 처음에는 ‘조광미(趙光美)’로, 두번째는 ‘조정미(趙廷美)’로 이름을 두 번이나 바꾸어야 했다.
조광미는 조광윤이 유랑생활을 떠나기 1년 전인 947년에 태어나 984년(태종9)에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송태조 당시 황제의 아우로서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976년(태조17) 송태조가 갑자기 죽게 되자, 두태후가 유언으로 남겼다는 의문의 ‘금궤지맹’에 따라 조광의가 태종으로 즉위했다.

태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송태조 다음은 조광의가, 그 다음은 조광미, 그 다음은 조광윤의 아들 조덕소” 순으로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두태후의 유훈에 따라 조광미는 다음번에 황제가 되는 번호를 타게 되었다.

따라서 태종은 조광미를 제왕(齊王)으로 봉하는 한편, 그의 형 조광윤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황제가 되는 수업을 쌓도록 변경윤(汴京尹) 겸 재상인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가지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출에 불과했다.

 

그 후 5년이 지난 981년(태종6) 9월, 여경사(如京使) 시우석(柴禹錫) 등 70여명이 “조정미(趙廷美)가 황제의 동생이라 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다.”고 태종에게 고발했다.
사실 시우석은 조광의가 황제가 되기 전 진왕(晋王)으로 있을 때 진왕부(晋王府)에서 일했던 그의 심복이었다. 또한 다시 재상으로 복귀한 조보(趙普)는 변경지부(汴京知府) 이부(李符)를 시켜 “조정미가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태종을 원망하고 있으며, 화를 피하기 위해 먼 지방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태종에게 알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조광미는 982년(태종7) 변경윤(汴京尹)에서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좌천당했다. 984년(태종9) 또다시 좌천당해 방주지주(房州知州)로 가 있을 때 조광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병이 도져서 마침내 죽고 말았다. 방주(房州)는 송태조 당시 후주의 마지막 황제 시종훈(柴宗訓)이 머물렀다가 부인이 비명에 죽자 스스로 굶어서 죽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어느 때인가 태종 조광의가 재상 조보에게 물었다.
「짐(朕)이 금궤지맹(金櫃之盟)대로 후일 정미(廷美)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줘도 괜찮겠소?」
이에 조보가 대답했다.
「태조께서 이미 잘못을 저지르셨는데, 폐하께서 어찌 다시 잘못을 저지르려 하십니까? <太祖己誤 陛下豈容再誤邪>」

 

▶ 조광윤의 누나와 누이동생

 

조광윤에게는 남자 형제 세 명 외에 두 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는데, 그의 누나와 여동생이다.

그의 누나는 15세가 되었을 때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962년(태조3), 송태조 조광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누님을 기리면서 ‘진국장공주(陳國長公主)’로 추봉했다.
그녀는 비록 황제가 된 동생을 보지 못했지만, 어릴 때 그녀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조광윤은 늘 자상했던 누나를 그리워했고 그녀에게 시호(諡號)를 추봉해 주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누나도 잊지 못하는 조광윤은 살아있는 여동생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다.

그의 여동생은 미복덕(米福德)에게 시집갔었는데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어 친정집에서 살았다. 그녀는 어머니 두씨를 닮아 대의를 깊이 알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후주 세종이 죽은 후 7세의 어린 아들 공제(恭帝)가 황위에 오르자, 나라는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빠지게 되었고 조정 안팎으로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하자는 여론이 돌면서 도성에는 일시에 이런저런 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말들을 듣고 불안을 느낀 조광윤은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던 여동생은 오빠의 얘기를 듣고 순식간에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손에 밀방망이를 든 채 방안으로 들어와 오빠 조광윤을 향해 총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부라면 큰일에 부딪쳤다 해도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지 왜 집에 돌아와 아녀자들을 놀라게 합니까?」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밖으로 나간 조광윤은 귀덕부(歸德府)에 가서 절도사 직책을 수행하면서 이러한 말들에 말려들지 않도록 처신하고 다시는 집안에서 나라 대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조광윤과 여동생의 깊은 우애를 알 수 있다.
조광윤은 황제로 즉위한 후 그녀를 ‘연국장공주(燕國長公主)’로 책봉했다. 그는 또 젊은 여동생이 혼자 사는 것이 안쓰러워 나랏일이 바쁜 와중에도 늘 재혼시킬 대상을 물색했다.
황제가 된 지 얼마 안되어 마침 전전부도점검 고회덕의 아내가 죽자 조광윤은 누구에게 부탁해 두 사람을 만나게 알선해 주고 그들의 재혼을 성사시켰다.

이리하여 황제의 손아래 매부가 된 고회덕은 장군가문 출신의 용맹한 장수였다.
조광윤이 직접 신경을 써서 여동생과 고회덕의 재혼을 성사시켰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국장공주는 973년(태조14) 10월에 고회덕과 재혼해 불과 10년 남짓 행복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비애를 금치 못한 황제 조광윤은 그녀의 영구를 잡고 통곡했다. 그는 또 5일간 조정의 모든 정무를 전폐했다. 이로부터 여동생에 대한 그의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속담에 “금산(金山)이 있고 은산(銀山)이 있어도 남편이 있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이치인 것이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낙(樂)이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한 이치를 조광윤은 알고 있었다.
가식적이고 허풍을 떨며 스스로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다른 전제독재의 황제들과 비교해 볼 때, 조광윤은 형제들을 진심으로 대해 주었고 조금도 거짓됨이 없었다. 그러한 감정과 책임을 도(道)에 어긋나지 않게 원만하게 처리한 조광윤은 다른 황제들에 비해 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