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렴한 장군 조광윤
조광윤은 후주 세종이 회남출정을 시작한 때부터 줄곧 거침없이 성을 공략하고 땅을 획득했다.
남당왕 이경(李璟)은 그가 누차 전공을 세우고 명성이 남당조정을 뒤흔들어 놓자 이간계(離間計)를 쓰기로 했다. 그는 몰래 사람을 보내 조광윤을 찾아가 백은(白銀) 3천 냥을 건네고 고관대작과 높은 녹봉을 약속한 편지를 전했다.
이로써 세종과 조광윤의 군신관계를 이간질하려 했다.
그러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조광윤이 어떻게 이런 일로 큰일을 그르치겠는가? 그는 “금은보화가 한집안 가득 있다 해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한 『도덕경』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으므로, 추호도 흔들림 없이 뇌물을 모두 후주의 국고에 상납하고 이 일을 세종에게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조광윤은 어떤 경우라도 남의 것을 거저 손에 넣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후주군의 대장군이 되고 또 수많은 적의 도성을 공략하고 땅을 탈환했으나 얻은 재물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타는 말에 채울 안장과 입는 옷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다.
뿐만 아니라 『송사(宋史)』「장영덕전(張永德傳)」에 따르면, 첫째부인 하씨(賀氏)가 일찍 죽고 둘째부인 왕씨(王氏)와 결혼할 때도 조광윤은 혼사치를 비용마저 없어서 상관 장영덕이 도와주어서야 겨우 아내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동생 조광의가 후주 세종 시영(柴榮)의 장인이던 부언경(符彦卿)의 딸과 결혼할 때에도 돈이 없어 고민하다가 역시 장영덕의 도움으로 해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가 청렴한 무장이었으며 그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조광윤은 실로 군자의 미덕을 갖춘 사람인 것이다.
956년(세종3) 2월 남당군을 격파하고 저주를 탈취한 조광윤은 많은 재물을 노획했다.
후주 세종은 한림학사 두의(竇儀)를 파견해 노획한 남당의 군용물자를 관리하도록 명했다.
그때 조광윤이 부하를 보내 창고에 있는 비단 몇 필을 좀 줄 것을 요구했는데 두의에게 그만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저주를 탈환한 장군으로서 성안에 있는 물자를 손에 넣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조광윤이 물자를 약탈하도록 병사를 종용하지 않은 것만 해도 칭송할만하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얼마든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나 언제나 신중했다. 이는 멀리 내다보고 대사를 이루려는 조광윤의 두터운 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광윤이 후주의 장군시절 세종을 따라 회남에 출정했을 때, 그가 수주(壽州)에서 사사로이 많은 재물을 챙겼다고 세종에게 고발한 자가 있었다.
세종은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조광윤의 짐수레를 수사하게 했는데 발견한 것은 전부 책뿐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보더라도 조광윤은 눈앞의 재물보다도 머릿속의 재물을 더욱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