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4)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 출천대효(出天大孝) 조광윤

 

조광윤은 부모를 남달리 공경한 효자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했고 결혼한 후에는 아내 하씨(賀氏)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생활했다. 군에 입대하여 전공을 세우고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분가하지 않고 여전히 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95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어머니를 더욱 지극하게 보살폈다. 아내더러 늘 어머니 곁에 있게 하는 외에 자신도 밖에 따로 거처를 두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께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드렸다.
그러므로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도 천하일을 꿰뚫고 있는 두태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조광윤이 어머니를 존경하고 늘 어머니와 감정을 교류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조광윤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황제가 되어서도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고 진심으로 훈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등극한 후 바로 어머니를 태후(太后)로 봉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경우, 등극한 후 5일에 한 번씩 아버지 태공(太公)을 알현했다. 태공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서 황제와 신하간의 예의를 갖추려 하자 그때서야 한고조는 그를 태상황(太上皇)으로 봉했다.

유방과 조광윤은 공히 개국 황제이고 다 웃어른이 있었지만 서로 나눈 정과 예의는 달랐다. 조광윤은 지극한 효성을 보여 주었지만 한고조는 일반 부자지간의 예의로 태공을 대했다. 조광윤과 비교해 볼 때 유방의 효도는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961년(태조2)에 두태후의 병이 위중해지자 송태조 조광윤은 평민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곁에서 정성스레 병시중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임종 전에 곁을 지켜주는 귀한 자식이 있어 위안을 얻고 편히 갈 수 있었다.
중국역사에서 병환이 위중한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며 곁을 지켜준 황제는 조광윤 한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황제들은 황위를 위해 또는 바쁜 국사를 핑계로 부모를 멀리했었다.
두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조광윤은 어머니를 ‘명헌태후(明憲太后)’로 봉했고, 964년(태조5)에는 또 ‘소헌태후(昭憲太后)’라는 시호를 더 붙여 드렸다. 그리고 그의 외조부 두상(杜爽)은 ‘태사(太師)’로 봉했다.
조광윤은 어머니를 대함에 있어서 살아계실 때는 훈계를 잘 받들었고, 사후에는 시호로써 예의를 갖추었다. 한 시대의 영명한 황제 조광윤은 지극한 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조광윤의 출생을 둘러싼 비화(秘話)

927년 2월 16일 조빙파(趙冰波) <송조도략(宋朝韜略)> 에서는 조광윤의 출생을 927년 3월 16일로 쓰고 있다.
, 후일 조광윤은 후당의 명종 2년에 수도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협마영(夾馬塋)이라는 군영(軍營)에서 태어났다.
그때 조광윤의 증조부와 조부가 다 살아계셨는데, 증조부 조정(趙挺)은 그가 두 살 때 돌아가고, 조부 조경(趙敬)은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역사로는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고구려의 대통을 이어받은 발해(渤海) 발해(渤海 698-926): 고구려를 계승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229년간 존속했던 국가이다. 926년 1월에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거란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조광윤이 태어나기 1년 전(926년) 안타깝게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한반도 내에서는 후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조광윤이 태어난 해는 통일신라는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이 즉위했고, 고려는 태조 왕건(王建)이 918년에 개국해 즉위한 지 10년, 후백제는 견훤(甄萱)이 즉위한 지 36년이 되었다.
조광윤과 비슷한 시기의 고려 임금은 과거(科擧)제도 실시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으로 유명한 제4대 광종(光宗)이었다.
조광윤이 927년에 태어나서 976년(태조17) 5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광종 왕소(王昭)는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로서 조광윤보다 2년 전 925년에 태어나서 975년(태조16)에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혼란했던 시기 혼란했던 시기: 중국은 오대십국시대, 한국은 후삼국시대가 끝난 직후에 집권하여 똑같이 황권과 왕권 강화를 위해 ‘중앙집권제 확립’에 노력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다만 그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광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족(豪族)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면, 조광윤은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의 고사(故事)를 만들어 내면서 개국공신들과 술을 나누면서 원만한 대화를 통해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는 점이 다르다.
조광윤이 태어난 해는 289년 동안(618년-907년) 강성함을 자랑하던 당(唐)나라가 망하고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저마다 나라를 세워 소위 오대십국(五代十國)으로 사분오열되어 혼란하기 그지없던 무인집권시대였다.
따라서 힘없는 백성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 없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던 난세였다. 그러나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이 있듯이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태어난 조광윤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행운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은 때를 잘 맞추어 태어난 ‘시대의 행운아’였던 것이다.
조광윤이 태어나던 해는 오대(五代) 중 두 번째 왕조인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그의 양부 장종 이존욱을 몰아내고 즉위한 이듬해인 천성(天成) 2년이었다.
그때는 명종이 ‘휴병식민(休兵息民)’정책을 실시하여 전쟁을 멈추고 풍년이 들어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시절이었다.
장종이 돌아가자 그의 총애를 받았던 무장 조홍은은 금군에 남아 있었지만, 축출된 전임황제의 측근으로 분류되어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날 때의 집안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다만 그가 대대로 관료가문이라는 안정된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명종의 평화정책으로 인해 비교적 평온하고 꿈 많은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조광윤은 낙양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인 937년 1월 후진의 개국황제 석경당이 수도를 변경(汴京)으로 옮기자 아버지를 따라 변경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낙양은 그가 태어날 당시 이미 천여년 동안 중국 9개 왕조의 수도(首都)로서 줄곧 황제가 머물렀던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경제가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문화의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이 유서 깊고 문화가 번성했던 고도(古都) 낙양에서 태어난 조광윤은 아마도 성장과정에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문화적 영양분’을 공급 받았을 것이다.
낙양 근교에 위치한 협마영은 금군의 한 군영(軍營)으로서 ‘갑마영(甲馬營)’이라고도 불렀고, 조광윤이 태어날 때 몸에서 향내가 났다고 하여 후일 ‘향해아영(香孩兒營)’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태종(太宗)을 이어 즉위한 진종(眞宗) 때 이곳에 “하늘의 뜻을 받은 곳”이라는 의미의 ‘응천사(應天寺)’라는 절을 지었고, 나중에는 “상서로운 일이 발생한 곳”이라는 뜻의 ‘발상사(發祥寺)’로 개칭했다.

 

조광윤의 태어날 때 비화(秘話)는 여러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태후가 그를 임신했을 때 커다란 태양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날 때 탯줄과 태반이 연꽃모양과 같았고, 붉은 빛이 방안을 휘감았고, 방안에는 향내가 하룻밤이 지날 때까지 감돌았으며, 온몸은 황금색을 띠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비한 이야기는 믿기가 어렵지만, 아마도 조광윤이 훗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출생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으로 묘사한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제왕의 기상을 타고 태어났더라면, 그 혼란했던 오대(五代)시기에 벌써 어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역사에 송나라와 송태조 조광윤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 따르면,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한 960년 12월에 그가 후주시절을 회고하면서 신하들에게 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나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평복을 입고 미행(微行)을 했는데, 누군가가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하며 말리자 조광윤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왕이 되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기 때문이오. 후주의 세종은 무슨 연유에선지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 얼굴이 네모나고 귀가 큰 자를 보면 모두 죽였으나, 나는 종일토록 그를 옆에서 모셨어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소.」

조광윤 출생 당시 재위했던 후당의 명종은 돌궐족(突厥族)의 한 갈래인 사타족(沙陀族) 출신으로, 『신오대사(新五代史)』「명종본기(明宗本紀)」에 따르면 조광윤이 태어날 무렵 매일 밤 향(香)을 사르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고 한다.

「신(臣)은 본래 번인(蕃人) 번인(蕃人): 티베트(Tibet)지역에 9세기까지 약 200년간 존속되었던 왕국을 중국인들은 ‘토번(吐蕃)’이라고 불렀는데, ‘번인(蕃人)’이란 티베트지역 즉 ‘토번(吐蕃)’ 출신 사람이라는 뜻이다.
입니다. 어찌 천하를 흡족하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혼란해진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하늘께서는 하루빨리 성인(聖人)을 낳아주십시오.」

이는 명종 이사원의 기도에 의해 한족(漢族) 출신의 조광윤이 탄생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구오대사(舊五代史)』「공제기(恭帝紀)」에 따르면, 조광윤이 후주의 군 최고사령관인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으로 있을 때 그가 꾸었다는 꿈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광윤이 후주의 세종을 따라 연못가에서 놀던 중 세종이 도장을 들고 보다가 그의 아들인 양왕(梁王)을 뒤돌아보았으나 그에게 주지 않고 조광윤에게 주었다.」

여기서 양왕(梁王)이라 함은 세종 시영(柴榮)의 아들로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로 즉위하는 시종훈(柴宗訓)이 황제가 되기 전에 태자(太子) 때 봉해진 작위(爵位)였다. 이는 조광윤이 하늘로부터 황제가 되어야 하는 천명(天命)을 부여받은 사람임을 암시하는 이야기이다.

 

4. 조광윤과 세 명의 부인

 

조광윤은 황후 이외에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 이것은 삼국시대 조조(曹操)와 같은 경우로, 그는 역사상 일부일처제를 굳게 지킨 드물게 보는 제왕이다. 주(周)나라 예제(禮制)에 의하면 황제는 9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제후(諸侯)는 7명, 대부(大夫)는 1처 2첩, 진사(進士)는 1처 1첩을 둘 수 있으며, 평민은 일부일처였다. 조광윤은 도가사상을 숭상했지만 유교사상도 존중했기 때문에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주나라 예법을 많이 따랐지만, 혼인문제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34세밖에 안된 청년이었고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대를 이을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있었지만 부인은 오직 황후 한 사람만 두었다.
특히 황후 왕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4년여 동안 독신으로 생활했다. 조광윤은 무엇 때문에 소실을 두지 않았는가? 첫째는 도가(道家)의 도덕관념이 그로 하여금 신심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갖게 한 것이다.
그의 방에는 “욕심이 적은 것이야말로 최상의 양생법(養生法)이다. <養身莫若寡欲>”라는 격언이 걸려있었다.
둘째는 역사에서 황제들이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자식을 많이 낳은 탓에 서로 황제의 총애와 황위를 얻기 위해 처절한 쟁탈전을 벌이고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자아낸 데 대해 그는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에 소실을 두는 것을 거절했다. 이것도 송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참신한 느낌을 받게 되는 원인의 하나이다.

 

조광윤은 일생동안 세 번 결혼했다. 세 명의 부인 중 첫째부인 하황후(賀皇后)가 낳은 3남 3녀 중 아들 두 명은 일찍이 죽었고 1남 3녀만 살아남았다. 둘째부인 왕황후(王皇后)가 낳은 1남 3녀 중 딸은 모두 요절했고 아들만 살아남았다.
셋째부인 송황후(宋皇后)는 자녀가 없었다. 일국의 황제로서 조광윤은 결국 2남 3녀로 만족해했고, 송황후가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을 때도 소실(小室)을 두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하황후(929년-958년)는 30세까지 살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부인 왕황후도 22세에 병이 들어 2년 동안 몸져 누었다가 24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셋째부인 송황후는 44세까지 살았다.
그녀가 25세 되던 해에 조광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독하게 20년간 홀로 살았다. 조광윤은 젊었을 때부터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항상 단정하여 끝까지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
모든 면을 아울러 보아도 역대 황제 중에서 조광윤은 가장 정직하고 깨끗하며 욕심이 적은 황제이다.

 

945년(후진 출제4), 19세 되던 해 조광윤은 아버지 조홍은의 주장에 따라 후진의 금군 군교(軍校) 하경사(賀景思)의 큰딸과 결혼했다. 조광윤에게 시집올 때 하씨(賀氏)의 나이는 17세였고 두 사람은 천정배필이었다.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하씨는 매사에 온순하고 순종적이었으며 예절을 아는 규수였다. 하씨와 결혼한 그는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근심걱정 없이 행복한 부부생활을 했다. 그런데 결혼한 지 3년이 채 안된 948년 그는 혼자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떠났다.
950년 그는 후한군(後漢軍)에 입대하였고, 956년 후주 세종 때 남당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광국군(匡國軍)절도사로 승진했다. 이로써 조광윤 부부는 일시에 존귀한 신분이 되었고, 하씨(賀氏)는 ‘회계군부인(會稽郡夫人)’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좋은 세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씨(賀氏)는 애석하게도 958년 조광윤이 황제가 되기 2년 전 결혼생활 13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씨 부인과 정이 깊었던 조광윤은 황제가 된지 2년 후 962년(태조3) 4월에 그녀를 황후로 추봉(追封)하고 시호를 ‘효혜황후(孝惠皇后)’라 했다.

 

하씨(賀氏)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32세 한창 나이에 전전도지휘사의 지위에 있는 조광윤이 홀아비로 있자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상대를 알선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958년(세종5) 창덕군(彰德軍)절도사 겸 시중(侍中) 왕요(王饒)의 셋째딸을 두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이때 청렴했던 조광윤은 혼례 치를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워서 상관 장영덕(張永德)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겨우 왕씨부인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장인 왕요가 딸의 혼인을 못보고 그 전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왕씨(王氏)가 조광윤에게 시집 올 때 나이는 19세였다. 고관의 딸로서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그녀는 예법을 잘 알고 학식과 교양이 있는 훌륭한 규수였다. 조씨(趙氏) 집에 시집 온 후 그녀는 부지런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인자하고 소박했으며, 남편을 잘 모시고 시어머니에게 효도하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왕씨 부인은 부엌살림을 직접 도맡아 했으며, 거문고로 옛 음률을 잘 탔고 불교를 신실하게 믿었다. 후주 세종은 그녀에게 좋은 옷을 하사하고 ‘낭야부인(琅邪夫人)’으로 책봉했다. 왕씨(王氏)는 운 좋게도 시집 온 지 채 2년이 안되어 남편이 황제가 되어 개국황후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명이 짧았다. 조광윤과 5년 동안 살고 그녀는 963년(태조4) 말에 병으로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왕황후가 너무나 일찍이 세상을 뜨자 애통에 빠진 조광윤은 그녀에게 ‘효명황후(孝明皇后)’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왕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조광윤은 4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로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돌아온 그는 고독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국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967년(태조8) 조광윤의 생신날에 충무(忠武)절도사 송굴(宋倔)의 딸이 어머니를 따라 조정에 와서 ‘장춘절(長春節)’에 참석했다. 젊은 송씨(宋氏)를 본 조광윤은 그녀에게 좋은 옷을 한 벌 하사했다.
조광윤은 단정하며 똑똑하고 아름다운 송씨를 보고 황후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968년(태조9) 2월에 그는 송씨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이때 송씨는 17세였고 조광윤은 42세였다. 나이 차이가 25세나 되는 이 결합은 봉건황제에게 그리 상식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과연 송씨는 황후가 된 후 조광윤을 극진히 보살폈다.
조광윤이 조정에서 돌아올 때면 옷을 단정히 차려 입고 마중 나갔으며, 음식은 친히 검시하고 한 시대의 개국황제가 진지 드는 것을 옆에서 돌보면서 그의 고독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송황후는 아쉽게도 무슨 이유에선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해, 왕황후가 낳은 아들 덕방(德芳)을 친아들처럼 아끼고 의지했다. 송황후의 어머니는 후한(後漢)을 세운 유지원(劉知遠)의 외동딸 영영(永寧)공주로서, 조광윤은 후한 고조 유지원의 외손녀사위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