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검소함을 몸소 실천한 황제
조광윤은 어린 시절의 스승 신문열이 청빈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아 황제가 된 이후에도 금붙이가 붙은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를 일체하지 않아 역대 어느 황제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어좌(御座), 황관(皇冠), 어의(御衣), 어가(御駕)도 금붙이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황관(皇冠)의 경우, 황금으로 만들지 않고 선비들이 쓰는 모자의 옆머리에 신하들보다 긴 검정 막대기만 매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의 후대 황제들은 모두 태조 조광윤이 썼던 모양의 검소한 황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황후와 자녀들에게도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인 조광의와 조정대신들에게도 검소함을 근본으로 삼고 사치를 버리도록 권유했다.
중국 통일전쟁에서 여러 차례 대승을 거둔 송나라는 조정에서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건륭(建隆), 건덕(乾德), 개보(開寶) 등 세 차례 연호를 바꿀 때에도 축하행사를 일체 거행하지 않았다.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히 살며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합된 모습이었지만 태평성세를 이루었다고 자축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그가 지배하고 있는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데 온 정열을 쏟고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겸허하고 검소한 것은 제왕의 미덕이며 마음이 깊고 성숙된 표현이다. 조광윤이 바로 그러한 제왕이다.
▶ 궁녀 해방
송태조 조광윤은 수백 명의 궁녀들을 해방해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행복추구권을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황궁을 검소한 분위기로 일신했다.
그는 궁중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궁녀, 내시, 궁중 사무관리 등 후궁(后宮)에서 일하는 인원을 일제히 점검했는데 도합 380명이었다.
그는 즉시 조령을 내렸다.
「궁중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돌아갈 자금을 마련해 줄 터이니 구체적인 사정을 고하기 바란다.」
그 결과 150명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신청했고, 조광윤은 즉시 후한 하사금을 주고 그들을 내보냈다. 그 후 인원이 점차 줄어 황궁에는 실제로 1백여 명만 남게 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역대 황궁에서 인원수가 가장 적은 기록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조치는 후세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전반적으로 송나라의 후궁(后宮)에는 항상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송나라에 비해 훨씬 작았던 우리나라 백제(百濟)의 의자왕(義慈王)이 3천 궁녀를 두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것과는 대조적인 이야기다. 이것만보더라도 개국군주와 망국군주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닐까?
▶ 낡은 어가(御駕)
조광윤은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신봉해 노자(老子)의 세 가지 보물인 ‘인자함, 검소함, 선두에 나서지 않는 것’을 실천했다. 그러므로 그는 늘 소박했고 사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송태조 조광윤은 황후를 비롯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황후가 말했다.
「폐하가 타고 다니시는 어가(御駕)는 벌써 몇 번이나 보수했고 또 아무런 장식품도 없습니다. 황제이신데 금은보석으로 장식된 어가를 이용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조신과 백성들이 너무 인색하다고 원망할거에요.」
그러자 송태조 조광윤이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사해의 재물은 다 나의 것이오. 내가 관리하는 금은보석은 가마가 아니라 궁전 전체를 장식한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천하의 백성이 모두 금은으로 장식하려 한다면 한 개의 단추도 장식하지 못할 것이오. 천하의 재물은 천하 백성의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사용할 수 있겠소? 옛 사람이 말했듯이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지만 천하가 한 사람을 추대해서는 안되오.” 혼자만 누리면서 재물을 마구 쓴다면 천하 사람들이 당신을 추앙하겠소? 황제는 여유 있게 천하를 위해 봉사해야 하오. 다시는 이러한 말을 하지 마시오.」
그는 여전히 여러 번 수리한 어가를 타고 조정에 나갔다. 송태조 조광윤의 검소함을 근본으로 삼은 성품은 조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당시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사회 전반에는 근검절약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