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6)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 조광윤의 4남 덕방(德芳)

 

4남 덕방(德芳)은 조광윤이 황제에 오르기 1년 전 959(세종6)년에 태어나 형 덕소보다 여덟 살 아래였다. 그리고 그는 981년(태종6) 뚜렷한 병명도 없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병사했다.
왕황후가 낳은 아들 덕방은 4남이지만 하황후가 낳은 덕소에 이어 차남 노릇을 했다.

조광윤이 죽던 해인 976년(태조17), 덕방이 18세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 귀주(貴州)방어사의 관직을 내렸다.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紀聞)』에 의하면, 송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송황후는 급히 내시 왕계은(王继恩)에게 진왕(秦王) 덕방에게 입궁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왕계은은 덕방을 부르지 않고 진왕(晋王) 조광의(趙光義)에게로 급히 달려가서 송태조의 죽음을 알렸다고 한다.
 이로써 세인들은 태종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형 송태조를 계획적으로 죽였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광의는 976년 11월 태종으로 즉위한 후 바로 덕방을 흥원윤(興元尹), 산남서도(山南西道)절도사, 동평장사(同平章事)에 봉했다. 978년(태종3) 겨울, 태종은 덕방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 직을 또 내렸다.
덕방은 형 덕소보다 2년 뒤인 981년(태종6) 23세의 나이로 잠을 자다가 무단히 죽었다. 이때 태종은 가마를 타고 가서 통곡했으며, 5일간 조정(朝廷)의 모든 일을 전폐했다. 덕소와 덕방이 짧은 기간 내에 연속해서 죽은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므로, 분명 태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다. 덕방이 죽은 후에 태종은 그에게 강혜왕(康惠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을 내렸다.
그 후 그는 다시 기왕(岐王)으로 봉했고, 또다시 태사(太師)로 봉한 후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덕방은 유서(惟叙), 유헌(惟憲), 유능(惟能) 세 아들을 두었다.

 

▶ 세 딸의 혼인 이야기

 

송태조 조광윤은 황제가 되어 국정에 분망했으나 그도 보통 사람들처럼 딸들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봉건시대에 특수성에 의해 황제들은 왕왕 딸들의 혼인문제를 정치와 관련시켰다.

조광윤의 장녀 소경공주(昭慶公主)는 황제의 딸이었기 때문에 자유연애를 하여 혼인할 기회가 없었고 혼사를 전적으로 부모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나서서 소개하는 혼인에는 정치적 색채가 있었고 또 이것은 봉건시대에서 늘 있던 일이었다.
평민도 그러했으니 하물며 황실이야 어떠하겠는가? 전전도지휘사로 있는 왕심기(王審琦)는 ‘의사십형제’의 한 사람으로 당시 전전도점검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는 금군의 통솔자였다. 어느 때인가 황궁에 화재가 났었는데 그는 황급히 군대를 동원해 황궁의 화재를 진압했다.
그러나 불을 진압한 그는 오히려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해 황궁에 진입한 죄로 어사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서 독단적으로 군대를 동원했으나 그것은 어쨌든 조정의 규율을 어긴 행위였다.
이 때문에 조광윤은 부득불 그의 전전도지휘사의 직무를 해제시키고 충정군(忠正軍)절도사로 임명해 수주(壽州)로 보냈다.

작별인사를 할 때 조광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卿)이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병사를 동원해 화재를 진압한 것은 충성스러운 행위요. 그러나 어사대에서 탄핵을 한 이상 처리할 수밖에 없소. 일단 번진(藩鎭)으로 가 있으면 후에 내 딸을 경의 아들 승연(承衍)에게 시집보내도록 하겠소.」
이리하여 소경공주는 왕심기를 위로하고 구슬리는 아버지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야만 했다.
비록 그는 딸을 주는 것으로써 군의 직무를 해제 당해 심기가 불편해진 왕심기를 위로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군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고위장군과 사돈을 맺어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정변을 방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심기의 아들 왕승연(王承衍)은 이미 낙씨(樂氏)와 혼약을 맺은 상태였다. 왕승연이 혼약을 맺은 것을 후에 알게 된 조광윤은 후회스러워 혼약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왕승연을 잘 알고 있는 소경공주는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언약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다행히 왕승연도 소경공주를 좋아했고 이 혼사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낙씨와의 혼약은 부모에 의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낙씨와의 혼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조광윤의 둘째딸 연경공주(延慶公主)도 정치적 목적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천평(天平)절도사 석수신의 아들 석보길(石保吉)에게 시집을 갔다.
석수신 역시 ‘의사십형제(義社十兄弟)’의 한 사람으로 진교병변 때 변경성(汴京城) 안에서 내응했고, 그가 등극한 후 마보군도지휘사로 승진했다.
조광윤이 장군들의 병권을 제거할 때 석수신은 천평절도사로 부임했다. 석수신은 군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고 또 번진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와 사돈관계를 맺은 것은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중요한 작용을 했으며 일종의 정략혼인이라 할 수 있다.

 

셋째딸 영경공주(永慶公主)의 혼인은 정치와 큰 관련이 없었다. 후주 장군시절 조광윤은 추밀사 위인포(魏仁浦)와 절친하게 지냈고 두 집은 자주 왕래했다. 당시 두씨부인은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어린 아들 위함신(魏咸信)을 눈여겨보았다.
그녀는 효순하고 예의바르며 영준하게 생긴 위함신을 좋아했다. 조씨(趙氏) 집에 놀러온 위부인(魏夫人)도 총명하고 예쁜 영경공주를 아주 귀여워했다.
그리하여 두 집은 어린 두 아이의 혼인을 약속했다.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위인포는 재상이었는데 황제와 사돈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그들은 더욱 기뻐했다.
그런데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두태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혼인을 더 이상 거론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경공주가 성인이 된 후 위씨 집에서는 변경윤(汴京尹)으로 있는 황제의 동생 조광의에게 사람을 보내 아들과 영경공주의 혼사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소꿉동무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위함신과 영경공주는 후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으나 영경공주는 이 혼인을 원하고 있었다.
전에 혼약을 했기 때문에 조광윤과 조광의도 쾌히 동의해 972년(태조13) 7월 두 사람은 혼인식을 올렸다.

조광윤의 성격은 자연스럽고 소박하기 때문에 황제로서 가정사를 처리하거나 자녀들의 혼인문제에서 부득이하게 정치적 이유로 감정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체로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존중했고 이러한 면에서도 그의 영명함과 인자함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