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8)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9. 조광윤의 후손

 

송태조 조광윤의 직계후손들은 북송(北宋)시기에는 아무도 황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광윤이 ‘촉영부성(燭影斧聲)’ 즉 ‘촛불 흔들리는 그림자에 도끼소리’라는 역사의 수수께끼를 남기면서 갑자기 죽은 후에 동생 조광의(趙光義)가 황위를 물려받아 송태종이 되었고, 그 이후는 모두 태종의 직계 후손들이 계속해 황위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다만 금(金)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운 후 첫 번째 황제가 아들이 없자, 그 이후 8명의 황제들은 모두 조광윤의 두 아들 덕소와 덕방의 후손들이 황위를 이어 받았다. 덕방(德芳)의 후손들이 남송 초기에 먼저 4대를 황제노릇을 하고, 남송 말기에 덕소(德昭)의 후손들이 4대에 걸쳐 황위에 올랐다.

▶ 차남 조덕소(趙德昭)의 후손

 

차남 조덕소는 951년에 태어나서 979년(태종4)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숙부 송태종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동안희정왕(同安僖靖王) 및 위왕(魏王) 조유정(趙惟正), 차남은 남양강효왕(南陽康孝王) 및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 3남은 서국공(舒国公) 조유고(趙惟固), 4남은 조유충(趙惟忠), 5남은 청원군공(清源郡公) 조유화(趙惟和)이다.
이 중에서 차남 조유길은 학문을 좋아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했다. 그는 특히 당숙이 되는 진종(眞宗)에게 군주의 도(道)에 관해 7권의 책을 써서 올렸는데, 진종은 그 책을 중히 여겨 장비각(藏秘閣)에 보존토록 명했다.

 

조덕소의 차남 조유길은 여섯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진강군(鎭江軍)절도사 겸 단양희목왕(丹陽僖穆王) 조수절(趙守節), 차남 회양후(淮陽侯) 조수약(趙守约), 3남 무성군(武成軍)절도사 겸 초국공(楚国公) 조수손(趙守巽), 4남 광주(廣州)관찰사 겸 노강후(盧江侯) 조수도(趙守度), 5남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 부양후(滏陽侯) 조수렴(趙守廉), 6남 공봉관(供奉官) 가림백(嘉林伯) 조수강(趙守康)이다.

 

조덕소가 송태종의 심한 질책을 받고 자결하자, 그의 3남 조유고(趙惟固)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바로 위의 형 조유길의 6남 조수강(趙守康)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로 와서 그는 이름을 ‘조지린(趙之遴)’으로 바꾸고 황해도 백천(白川)에 정착하여 배천조씨(白川趙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 사실은 의병장 조헌(趙憲)의 중봉문집에 기록되어 있고, 1998년 싱가포르 세계조씨간친대회와 2010년 서울 세계조씨간친대회에서도 조지린이 송태조 조광윤의 손자임이 확인되었다. 조지린은 고려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지내고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벼슬을 지내고 사후에 공화공(共和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유길의 막내아들(6남)로 숙부 조유고와 함께 고려로 건너온 조수강(趙守康)은 이름을 ‘조천혁(趙天赫)’으로 바꾸고 임천조씨(林川趙氏)의 시조가 되었다.
조수강은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고려로 건너와 충청도 임천(林川)에 정착해 살았다. 그는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장군과 함께 거란군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가림백(嘉林伯: 가림은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지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랐다. 그의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장엄면 상황리에 있다.

 

1126년에 금(金)나라가 송나라 수도 변경(汴京)에 침입했을 때, 송나라(北宋)의 마지막 황제 흠종(欽宗)이 그의 아버지 휘종(徽宗)과 함께 북쪽의 금나라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靖康之變)’이 일어나서 북송은 송태조 조광윤이 건국한지 167년 만에 멸망했다. 그 후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도망가서 1127년 임안(臨安)에서 남송(南宋)을 세우고 황제(고종)로 즉위해 송나라를 재건했다.
그런데 976년 송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죽은 다음 185년 동안 계속 송태종 조광의의 자손들이 황위를 독점함으로써, 조광윤의 직계자손들은 황제가 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남송의 첫 번째 황제인 고종(高宗) 조구(趙構)도 역시 송태종의 후손인데, 아들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송태조의 직계자손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 결과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117년 동안 송태조 조광윤의 차남 조덕소와 4남 조덕방의 후손들이 8대에 걸쳐 각각 4대씩 황위에 올랐다. 조덕방의 후손들은 남송초기에 나라가 안정되고 재위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4대에 102년 동안 재위했지만, 조덕소의 후손들은 나라가 기울어진 남송말기여서 4대에 걸쳐 겨우 15년 동안 황제로 재위했다.
남송(南宋)의 6대 황제 도종(度宗)은 덕소의 10세손이며, 남송의 7대 황제 공제(恭帝), 8대 황제 단종(端宗)과 마지막 9대 황제 유주(幼主)는 모두 도종(度宗)의 아들로 덕소의 11세손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사실은 송나라 319년 동안 역대황제 18명 중에서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두 황제의 이름만 두 자(字)이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이름이 한 자(字)인 점이다. 원래는 이들도 평민과 같이 두자의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황제가 되면 평민들과는 다르다는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한 자의 이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 4남 덕방(德芳)의 후손

 

4남 덕방은 조광윤이 황제에 오르기 1년 전 959년(세종6)에 태어나서 981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왕황후가 낳은 외아들 덕방은 조광윤의 4남이지만 하황후가 난 두 아들이 일찍 죽어서 차남 노릇을 했다.
덕방은 유서(惟叙), 유헌(惟憲), 유능(惟能) 등 세 아들을 두었다.
1044년 (인종4) 인종(仁宗)은 유서(惟叙)의 아들 종조(從照)를 안국공(安國公)으로 봉하고, 좌금오위(左金吾衛)대장군과 귀주단련사(貴州團練使)의 직책을 내렸다.

그가 죽은 후 동주(同州)관찰사와 제국공(齊國公)으로 추봉했다. 종조(從照)가 죽자 유능(惟能)의 아들 종고(從古)를 안국공(安國公)으로 봉하고, 연주(延州)관찰사의 직책을 내렸다.
종고(從古)가 죽은 후 보정군(保靜軍)절도사, 동중서평장사(同中書平章事), 초국공(楚國公)을 추봉하고, ‘혜각(惠恪)’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종고(從古)가 죽자 유헌(惟憲)의 아들 종식(從式)이 서국공(舒國公)을 세습했다.

 

조덕방의 후손들은 남송 초기에 4대에 걸쳐 황제에 재위했다.
그들은 조덕방의 6세손 남송의 2대 황제 효종(孝宗) 조선(趙昚), 7세손 3대 광종(光宗) 조돈(趙惇), 8세손 4대 영종(寧宗) 조확(趙擴), 9세손 5대 이종(理宗) 조윤(趙昀)이다. 이중에서 효종(孝宗)은 남송의 제일가는 명군으로 송태조 조광윤이 얻은 고토(古土)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금(金)나라 역시 명군인 세종이 치세하고 있던 때라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