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3)

제1절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성장한 조광윤

▶ 아들이 황제가 되어도 우울했던 두태후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즉시 조상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어머니 두씨를 황태후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천하의 번진(藩鎭)을 다스리는 일과 비교할 때 이러한 일들은 조광윤가족의 사적인 일들이었지만 봉건 전제사회에서는 가족통치를 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 또한 나라의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태후는 혼란한 시기였던 902년 당소종(唐昭宗) 때 태어났다. 그때 군벌 주전충과 이극용은 잔혹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봉상(鳳翔)으로 도주한 당나라 소종(昭宗)과 비빈(妃嬪)들은 죽이나 떡으로 겨우 끼니를 이었다.
그 밑의 하인들은 매일 굶어서 죽어나갔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당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53년간은 소위 ‘오대(五代)시기’라고 하여 왕조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14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왕조와 황제가 자주 바뀌는 난세 속에서 무인정치에 혐오를 느낀 두태후는 아들이 황제가 된 데 대해서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진교병변 후 조광윤이 황제로 옹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태후가 말했다.

「내 아들은 평소에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과연 황제가 되었구려!」
조광윤이 두씨를 궁으로 모셔 와 태후로 책봉했을 때 그녀는 안색이 흐려졌다. 태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물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분에 의해 귀한 몸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아드님이 황제가 되었는데 왜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두태후가 말했다.
「군주의 자리는 어려운 자리라고 들었소. 황제는 백성 위에 군림하지요. 나라를 잘 다스렸을 때는 그 자리가 존귀한 자리로 되지요. 만일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다면 다시 필부(匹夫)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지요. 그래서 기분이 우울한 것이오!」
두태후의 말을 들은 조광윤은 넓적 엎으려 절하며 말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두태후가 이러한 깊은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범함이 엿보인다. 조광윤은 평소에 어머니를 존경하고 효도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아온 그는 두태후의 식견에 매우 탄복했다.

그는 지금 어머니가 언급한 깊은 이치를 가슴 깊이 새기고 그대로 이행할 것을 결심했다. 조광윤은 두태후에게 다짐한 대로 많은 황제들과는 달리 서민적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신의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근면하게 국정에 온힘을 쏟은 후덕하고 도덕적인 황제가 되었다.

 

두태후는 또한 담대한 여인이었다.

대범하고 자신감 넘친 그녀는 조광윤이 성장하자 자립하도록 독려하고 새매를 새장에서 놓아 주듯 유랑생활을 허락했다.

2년 동안 유랑생활을 겪은 조광윤은 스스로의 힘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0년간 무수한 전쟁터를 누비면서 승승장구했고, 진교병변을 통해 황제가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조광윤은 진교역에서 경성에 회군하기 전에 가족이 불안해 할까봐 급히 초소보(楚昭輔)를 보내 가족을 사원(寺院)에 피신시켜 불의의 봉변을 방비하게 했다.

이때 두태후는 아들의 뜻대로 사원에 피신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아들이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고 웃었다.

조광윤의 부인 왕씨가 진교병변의 소식을 듣고 큰 화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자 두태후는 태연자약하게 며느리를 위안했다.
「내 아들은 평생 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꼭 부귀를 누릴 것이라고 했으니 걱정 말거라.」

 

▶ 두태후, 두씨 일족의 정치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

 

두태후는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늘 교만하지 않았고 자식에게 “제왕의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인가”를 늘 경계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신흥왕조에 화근을 남기지 않으려고 인척들이 특수신분에 의해 출세하려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남편이 4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는 황궁의 가장으로서 황제의 친척들을 단속하는 책임을 졌고, 친정집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히 단속했다.
 
그의 친오라버니 두심경(杜審瓊), 남동생 두심조(杜審肇)와 두심진(杜審進)은 두태후가 건재할 때 줄곧 상산(常山)의 집에 있으면서 누구도 관직에 기용되지 않았으며 유명무실한 직책만 맡고 있었다.
 
이로써 조광윤이 문인정치를 실시하고 유능한 자를 임용하며 엄격한 기준에 의해 신하를 기용하는 데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

이것은 조광윤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역사에서 모후(母后)가 정권에 개입하고 외척이 정치에 간여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예가 많았다. 송나라에 전반에 걸쳐 외척이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것은 두태후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송태조 조광윤은 두태후가 돌아간 이듬해인 962년(태조3)이 되어서야 그동안 일체 관직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던 두씨 일족에게 관직을 내려줄 수 있었다.

조광윤은 외숙부 두심경에게 좌용무군(左龍武軍)대장군, 두심조에게 좌무위(左武衛)상장군, 두심진에게 우신무(右神武)대장군을 수여했다.

그는 두심경의 아들 두언규(杜彦圭)에게 육택부사(六宅副使), 두심진의 아들 두언균(杜彦鈞)에게는 공봉관(供奉官) 직을 내렸다.

그런데 두심조의 경우, 그가 전주(澶州)의 지주(知州)로 있을 때 황하의 제방이 터지는 심각한 수해상황을 조정에 제때에 보고하지 않아 조광윤은 그를 지주 직에서 파면시켰다. 당시 전주의 통판(通判) 요서(姚恕)는 같은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