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후촉의 정치집단 내부에는 북방 중원의 신흥 조씨왕조(趙氏王朝)에 대한 태도에서 의견이 상충되었다. 하나는 재상 이호(李昊)를 대표로 하는 무리로서 송나라에 조공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후촉의 지위를 보존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추밀사 왕소원(王昭遠)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는 그것을 단호히 반대했다. 후촉의 산남(山南)절도사부 판관 장정위(張廷偉)가 왕소원에게 말했다. 「왕공께서는 추밀사에 오르셨으니 큰 업적을 쌓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자를 북한에 보내 군사를 남하시키도록 합시다. 나는 황화(黃花)와 자오곡(子午谷)에서 출병해 대응할 것이오. 그러면 중원은 안팎으로 공격을 당하게 되고 관우(關右)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소원은 관중 이동의 땅을 욕심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송군과 한판 붙으려 했다. 남의 밑에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후촉왕 맹창도 재상 이호의 말을 듣지 않고 무력으로 송나라에 저항하기 위해 협곡(峽谷)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수군을 증강하는 등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맹창은 송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추밀원대정관 손우(孫遇), 흥주군교 조언도(趙彦韜)와 양견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2. 후촉(後蜀) 평정 형남과 호남 두 나라를 평정하고 그 토지와 인구를 송나라에 귀속시키자 국력은 더욱 강대해졌다. 이것은 조광윤이 후주의 땅을 인계 받은 기초 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낸 영토 확장이었으며, 본래의 후주 땅을 수복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길을 빌리는 책략’과 적을 선제 제압하는 계략의 성공은 조광윤으로 하여금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더욱 굳은 결심을 다지도록 했다. 이제 후촉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형남을 얻은 만큼, 다음은 당초의 계획대로 풍요로운 후촉이 공격목표가 되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에 의지해 있던 후촉은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방대한 병력에 비해 군사력은 약했다. 전촉(前蜀)의 뒤를 이어 농업과 양잠업을 발전시켜 물산이 풍요로웠으며, 문인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촉에는 중원(中原)에서 전란을 피해 풍족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온 수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동쪽의 오(吳), 남당(南唐)과 더불어 오대십국 시대 최고봉의 문화를 꽃 피웠다. 후촉왕 맹창(孟昶)은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수도 성도(成都)의 곳곳에 부용화(芙蓉花)를 심어 ‘부용성(芙蓉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형남(荊南) 멸한 후 이어 호남(湖南)을 평정 조광윤은 등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남왕 주행봉에게 중서령(中書令)을 겸직하도록 했다. 962년(태조3) 9월에 주행봉이 중병에 걸렸다. 임종 시에 형세를 분석하고 난 그는 신하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은 후 내 아들 주보권에게 내 작위를 승계시켜 주시오. 나는 시골에서 군대에 들어온 사람이오. 함께 입대한 사람이 열 명인데 다 죽고 형주자사 장문표만 살아 있소. 그는 행군사마(行軍司馬)를 맡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늘 불만스러워했네. 내가 죽으면 장문표는 필연코 반역을 꾀할 것이니 당장 양사번(楊師璠)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시오.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싸우지 말고 성을 지키고 있다가 송조정(宋朝廷)에 귀순하기 바라오.」 양사번과 주행봉은 고향의 인척간이다. 친군(親軍)도지휘사로 있는 양사번은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주행봉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었다. 주행봉이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주보권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과연 주행봉이 예측한 바와 같이 주보권이 무안(武安)절도사를 승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문표는 노발대발했다. 「나와 주행봉은 미천한 데서부터 기병(起兵)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1. 형남(荊南)과 호남(湖南)을 일거에 평정 ▶ 호남 가는 길을 빌려 형남을 무혈(無血) 평정 송태조 조광윤이 “위대한 중국통일대업을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공격대상을 어느 나라로 할 것인가?” 대신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니, 모두들 후촉(後蜀)이라고 대답했다. 후촉은 북쪽과 동남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실시해 일거에 함락해야 한다고 했다. 북쪽은 후주시기에 이미 조광윤의 군사전략에 힘입어 진(秦), 봉(鳳) 등 4개 주를 탈환했기 때문에 이 노선은 출병하기에 비교적 편리했다. 동쪽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삼국시기에 유비(劉備)가 사천(四川)에 들어갈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노선에는 두개의 비켜갈 수 없는 할거정권 형남과 호남이 있었다. 비록 이 두개 나라가 명의상으로는 이미 송(宋)에 귀순했지만, 그들은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자치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독립왕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후촉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먼저 형남부터 탈취해야 했다. 그래야만 동쪽에서 후촉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을 열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형남을 공격하자니 출병할 명분이 없어 일시에 조광윤은
제1절 선남후북(先南後北)의 통일정책 수립마음속에 통일방침이 확립되자 조광윤은 구체적 실시방안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세는 이러했다. 북방에는 태원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있고, 서남에는 성도(成都)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후촉이 있고, 장강하류의 금릉(金陵) 일대에는 비교적 넓은 영토에 물자도 풍부했던 남당이 있고, 더 남쪽에는 항주(杭州)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오월이 있었다. 호북(湖北)의 강릉(江陵) 일대에는 형남 형남(荊南):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강릉(江陵)과 공안(公安) 일대의 지역이 있고, 낭주(朗州) 일대에는 호남이 있고,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에는 남한정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조광윤의 통일위업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당면과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쓰느냐?” 하는 것이었다. 후주 세종은 당초에 ‘선북후남(先北後南)’ 즉, 먼저 북벌을 시작해 거란이 점령하고 있는 연운16주를 수복해 거란과 북한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나아가 북한을 멸망시킨 다음, 다시 남방의 나라들을 통일하려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후주의 형부낭중 왕박(王僕) 왕박(王僕): 일부 기록에는 ‘왕박(王朴)’으로도 쓰여 있다. 당나라 말 906년에 동평(東平: 지금
제1절 선남후북(先南後北)의 통일정책 수립본시 전쟁이란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한하여 일으켜야 한다.”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해 백성들을 전란의 피해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부득이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는 통일전쟁을 하면서도 외교(外交)와 병행해 계책(計策)을 활용하여 가능한 한 군사와 백성의 목숨을 아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가 황제로 있는 동안 다섯 나라를 평정했지만, 형남(荊南)과 남당(南唐)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했다. 북한(北漢)의 경우, 도성(都城)을 포위하고도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가 공성(攻城)명령을 내리지 않아 결국은 포위를 풀고 회군해야만 했다. 오월(吳越)과 장천(漳泉)은 아예 전쟁을 하지 않고 인덕과 위엄으로 스스로 복속케 하였다. 황제의 어좌에 앉은 것이 이미 현실이 된 이상 조광윤은 더 이상 국가대사의 처리에서 한사코 겸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군사, 정치의 책략을 구현하려 했다. 즉위한지 1년 내에 그는 두 군데의 절도사 반란지역을 진압해 후주의 옛 지배지역을 회복했다. 그러나 송태조는 당시의 송나라 지역만으로는 세상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고 황제의 위풍을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7. 송태조 조광윤과 불교문화 진흥 송태조 조광윤은 제위에 오른 뒤 불교에 대해 후주 세종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폐지하고 청신한 불교문화의 진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은 오대시기의 가장 영명한 군주로서 경제를 발전시켜야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물자를 유통하는 매개체인 화폐가 부족하여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화폐가 부족한 이유는 장기간 동전(銅錢)을 만들지 않은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훼손하여 식기나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의 동기(銅器), 불상(佛像)을 거두어 화폐로 만드는 전문기구를 설치했다. 이 결과 후주시기의 불교는 불가피하게 억압을 받아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세종의 파불(破佛)사건을 이어 받은 송태조 조광윤은 세종의 억불정책을 따르지 않고, 먼저 불교 부흥정책을 취하여 많은 수의 불교신자들과 민심을 다독거리는데 힘썼다.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한 960년 6월에 천하의 모든 사찰에 조서(詔書)를 내려 후주가 발령한 사찰의 폐훼(廢毁)에 조치에 대한 중단을 명했다. 그리고 후주 시절에 없애야 했던 사찰로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6. 황제의 언행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게 하다 송태조 조광윤은 문인정치를 실시함에 있어서 역사서적을 편찬하는 것도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다. 974년(태조15) 10월에 지제고(知制誥)이며 사관편수찬(史館編修撰)인 호몽(扈蒙)이 상소문을 올렸다. 「지난 시기 당문종(唐文宗)은 대신들을 불러 국사를 논할 때 반드시 기거랑(起居郞)이나 측근에게 명하여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종실록(文宗實錄)』은 오늘날 가장 상세하고 완벽한 문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후에 당명종(唐明宗)도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와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에게 명하여 교대로 『일력(日歷)』을 적게 하여 사관(史館)에 수장했습니다. 근대에 와서 이러한 작업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비록 계절마다 내정의 『일력)』을 추밀원(樞密院)에서 기록해 사관(史館)에 보내지만 기록된 내용은 회견이나 의식 등일 뿐 황제의 언행이나 거동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누설의 혐의가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거나 사관(史官)이 벽을 두고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궁궐에서 일어나는 모든 국사의 결정, 우려와 동정의 언사 등은 모두 책자로 편집하되 재상, 참지정사(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5. 문인존중 풍토를 위해 스승 신문열을 방주지주(房州知州)에 임명 조광윤은 소년시절에 신문열(辛文悅)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현의 예의교육을 받고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신문열이 꾸린 학교는 사숙(私塾)이었으나 어쨌든 정규 전통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조광윤이 일생 동안 유일하게 교육을 받은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이후 십여 년 동안의 군대생활 속에서도 그는 학창시절을 역력하게 기억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그때의 교육과 가르침을 준 스승을 잊지 못했다. 그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 신문열을 찾아뵙도록 하고 제자로서의 예의를 올렸다. 그때 신문열은 이미 고령이었지만, 조광윤은 그에게 태자중윤(太子中允), 판태부사(判太府寺)의 관직을 주어 가르침을 준 은혜에 보답했다. 964년(태조5)에 또 그를 방주지주(房州知州)로 임명했다. 그는 솔선수범해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정과 일반사회에도 널리 영향을 미쳐 자제들을 학당이나 사숙에 보내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배우게 했다. 그의 세상을 다스리는 목표와 이상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문인정치를 실행하는데 아주 이로운 처사였던 것이다. 여기에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4. 적국(敵國)의 문관들도 평정 후 우대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한 후, 문인을 아끼고 지식을 숭상하는 원칙에서 적대국 문인들도 보호하고 관리로 등용해 문인정치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후촉 평정 후 후촉관리 중에 왕저(王著) 왕저(王著): 후촉(後蜀)의 명필로서, 후주(後周)의 대신으로 세종을 그리워해 술주정을 했던 한림학사 왕저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라는 하급관리가 있었는데, 글씨를 잘 쓰는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조광윤은 그를 조주(趙州) 융평현(隆平縣)의 주부(主簿) 주부(主簿): 회계관리인로 임명했다. 또 조광윤은 그를 경성(京城)에 불러들여 조정의 위위사승(衛尉寺丞), 사관지후(史館祗侯)로 임명했다. 후에 조광윤은 그가 서예뿐만 아니라 글을 잘 짓는 재주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아동학습서인 『급취장(急就章)』이라는 고문헌을 상세히 교정하는 일을 맡겼다. 임무를 맡은 왕저는 명성에 어긋나지 않게 신속하게 교정했다. 조광윤은 왕저의 서예가 뛰어난 것을 보자 또 그를 ‘한림시서(翰林侍書)’로 임명했다. 조정에는 원래 이러한 관직이 없었으나 그의 재능을 대견하게 생각한 조광윤이 특별히 그를 위해 마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