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인존중 풍토를 위해 스승 신문열을 방주지주(房州知州)에 임명
조광윤은 소년시절에 신문열(辛文悅)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현의 예의교육을 받고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신문열이 꾸린 학교는 사숙(私塾)이었으나 어쨌든 정규 전통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조광윤이 일생 동안 유일하게 교육을 받은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이후 십여 년 동안의 군대생활 속에서도 그는 학창시절을 역력하게 기억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그때의 교육과 가르침을 준 스승을 잊지 못했다.
그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 신문열을 찾아뵙도록 하고 제자로서의 예의를 올렸다.
그때 신문열은 이미 고령이었지만, 조광윤은 그에게 태자중윤(太子中允), 판태부사(判太府寺)의 관직을 주어 가르침을 준 은혜에 보답했다.
964년(태조5)에 또 그를 방주지주(房州知州)로 임명했다. 그는 솔선수범해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정과 일반사회에도 널리 영향을 미쳐 자제들을 학당이나 사숙에 보내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배우게 했다.
그의 세상을 다스리는 목표와 이상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문인정치를 실행하는데 아주 이로운 처사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조광윤은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은 백성 중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사숙(私塾)을 꾸리며 묵묵히 교육사업을 하는 인재들이 많았다.
그는 하나의 격식에 구애 받지 말고 과거를 거치지 않았더라고 진정한 학문이 있는 인재들에 대해서는 똑같이 중용하고 보다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나라 초기에 류개(柳開)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학문을 깊이 쌓은 그는 일찍이 후주 세종 시영(柴榮)의 글 선생으로 있었으며 고문(古文)에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과거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972년(태조13)에 지공거(知貢擧) 이방(李昉)이 과거시험을 주관할 때의 일이다.
불공정한 급제문제 때문에 낙방한 서사렴(徐士廉) 등이 이를 고소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운명의 신(神)은 류개에게 또 한 번의 시험기회 볼 주었다.
계속 과거에서 낙방한 류개에게 있어서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시험을 다시 치르게 된 것은 부정행위가 있을 수 없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또 낙방한 사실이었다. 다행히 한림학사 노다손이 오래 동안 그의 이름을 들은 바 있어서 그의 시험지를 찾아 재검토해 보고는 낙방원인을 찾아냈다.
그는 조광윤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류개는 유명한 학자이나 글자를 알아보기 쉽게 전서(篆書)로 또박또박 쓰지 않아 낙제점수가 나온 것 같습니다.」
조광윤도 그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류개를 불러들여 환담을 나누어 보았다. 과연 그는 학문의 조예가 깊고 넓었다. 크게 기뻐한 조광윤은 전례를 깨뜨리고 그를 합격시켰다.
전서(篆書)는 한(漢)나라 이전의 글자체인데 당시 송나라에는 해서(楷書)가 유행했다. 전서는 규범화된 문자가 아니고 획순이 번잡해 쓰기에 불편했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 과거에는 반드시 전서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류개는 고문(古文)에 대해 깊이 연구했으나 서예연습을 소홀히 하여 여러 번 낙방했던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은 표면적인 지식보다는 뜻을 깊이 이해하고 글의 흐름에 대한 문제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류개는 진정 학문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특별히 합격시켜 주었다.
진정한 학식이 중요하지 형식적인 글씨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시험을 중요시하면서도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도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