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송태조 조광윤과 불교문화 진흥
송태조 조광윤은 제위에 오른 뒤 불교에 대해 후주 세종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폐지하고 청신한 불교문화의 진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은 오대시기의 가장 영명한 군주로서 경제를 발전시켜야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물자를 유통하는 매개체인 화폐가 부족하여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화폐가 부족한 이유는 장기간 동전(銅錢)을 만들지 않은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훼손하여 식기나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의 동기(銅器), 불상(佛像)을 거두어 화폐로 만드는 전문기구를 설치했다.
이 결과 후주시기의 불교는 불가피하게 억압을 받아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세종의 파불(破佛)사건을 이어 받은 송태조 조광윤은 세종의 억불정책을 따르지 않고, 먼저 불교 부흥정책을 취하여 많은 수의 불교신자들과 민심을 다독거리는데 힘썼다.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한 960년 6월에 천하의 모든 사찰에 조서(詔書)를 내려 후주가 발령한 사찰의 폐훼(廢毁)에 조치에 대한 중단을 명했다.
그리고 후주 시절에 없애야 했던 사찰로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경우에는 존속을 허락하고 이미 없애버린 사찰의 불상을 옮겨다 안치도록 명했다.
그러나 새로운 조사(祖師)나 도승(道僧)에 대해서는 계속 제한을 두었으며, 후주 세종의 불교기강을 청신케 하려는 숙청정책(肅淸政策)을 이어 받으면서도 극단적인 면은 시정했다.
또한 송태조 조광윤은 즉위 당년에 황제 탄생일인 2월 16일을 ‘장춘절(長春節)’로 정하고 변경(汴京)의 상국사(相國寺)로 문무백관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 후로 송태조는 종종 상국사로 행차해 기우제(祈雨祭)를 올렸고, 969년(태조10)의 장춘절에는 천하의 승려와 불교신자들을 위해 과거시험에 「경율론(經律論)의 교의(敎義) 10조(條)」를 출제(出題)했으며, 이에 장원한 자에게는 붉은 자줏빛 가사를 하사했다.
조광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재 발굴의 수단인 과거(科擧)에 불경(佛經)을 출제함으로써, 송조(宋朝)가 불교를 중시하고 진흥시키려 한다는 점을 만방에 널리 알리게 했다.
그리고 시경도승(試經度僧)과 전시(殿試)에 의해 불교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승려들의 자질향상을 도모했다. 우리나라는 송태조 조광윤이 불교경론을 과거에 출제한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 고려 선종(宣宗) 때인 1083년에 처음으로 과거(科擧)에 승과(僧科)를 설치했다.
971년(태조12) 송태조의 명에 의해서 『대장경수색함은(大藏經隋函索隱)』 660권이 편찬되었으며, 당대의 명필인 장종신(張從申)에게 과거 후촉(後蜀) 땅이었던 익주(益州)로 가서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를 하도록 명했다.
경율론(經律論) 5천여 권과 10만여 편의 촉판(蜀版) 대장경을 새긴 이 대사업은 그 후 12년이 걸려 983년(태종8)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송태조의 불교 보호정책은 태종 때에 이르러 송조(宋朝)의 기초 확립과 함께 성과를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팔만대장경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1011년(현종2)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시작되어 1087년(선종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