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문관 우대정책 실시(18)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

4. 적국(敵國)의 문관들도 평정 후 우대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한 후, 문인을 아끼고 지식을 숭상하는 원칙에서 적대국 문인들도 보호하고 관리로 등용해 문인정치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후촉 평정 후 후촉관리 중에 왕저(王著) 왕저(王著): 후촉(後蜀)의 명필로서, 후주(後周)의 대신으로 세종을 그리워해 술주정을 했던 한림학사 왕저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라는 하급관리가 있었는데, 글씨를 잘 쓰는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조광윤은 그를 조주(趙州) 융평현(隆平縣)의 주부(主簿) 주부(主簿): 회계관리인로 임명했다.

또 조광윤은 그를 경성(京城)에 불러들여 조정의 위위사승(衛尉寺丞), 사관지후(史館祗侯)로 임명했다.

후에 조광윤은 그가 서예뿐만 아니라 글을 잘 짓는 재주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아동학습서인 『급취장(急就章)』이라는 고문헌을 상세히 교정하는 일을 맡겼다. 임무를 맡은 왕저는 명성에 어긋나지 않게 신속하게 교정했다.

조광윤은 왕저의 서예가 뛰어난 것을 보자 또 그를 ‘한림시서(翰林侍書)’로 임명했다.
 
조정에는 원래 이러한 관직이 없었으나 그의 재능을 대견하게 생각한 조광윤이 특별히 그를 위해 마련한 관직이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적국(敵國)의 한 하급 문신에 대해 이와 같이 중시했으니, 문인에 대한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후촉의 하급관리가 그의 실력으로 황제의 인정을 받고 파격적 대우를 받게 된 것은 조광윤이 실시한 문인정치의 특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과 인재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풍조는 고대에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오늘날에도 보기 드문 일이다.

 

남당의 청휘전학사(淸輝殿學士) 장계(張洎)는 진사 출신이며 재능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다.

남당왕 이욱(李煜)의 깊은 신뢰를 받았던 중신으로서, 그는 남당의 대내외 대사를 도맡아 처리했고, 이욱의 가족연회에도 종종 초대받았다.

송군이 금릉성(金陵城)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 장계는 투항할 것이 아니라 성을 고수해야 한다고 이욱에게 권유했고, 자신이 스스로 원군을 요청하는 조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송군이 금릉을 함락한 후 전범(戰犯)이 된 장계는 변경(汴京)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조광윤은 그를 심문할 때 그가 기초한 조서를 꺼내들고 장기간의 포위와 공격 때문에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초래한 데 대해 질책하면서 성난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이욱을 부추겨 투항하지 않는 바람에 문제해결을 이렇게 오래 끈 게 아니겠는가?!」
장계는 꿋꿋한 태도로 말했다.

「모든 것은 신(臣)의 소행이 맞습니다. “개도 주인을 위해 짖는다.”고 합니다. 이 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 입니다. 신은 죄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조광윤은 남당에 이와 같은 충신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그의 죄를 묻지 않았을 뿐더러 그를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중용했다.

얼마 안되어 또 형부(刑部)의 관직을 맞게 함으로써, 송나라에서 주요 권력을 행사하는 고위관리가 되게 했다.

이는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고 활달한 송태조 조광윤의 문인정치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후일 태종 조광의는 장계(張洎)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최고의 강동학사(江東學士)’라고 칭송했으며, 979년(태종4) 1월 그를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보내 북한(北漢) 정벌에 지원병을 요청한 바 있다.

 

남당이 멸망한 후 서현(徐鉉)도 장계와 함께 변경으로 압송되었다.

서현은 남당의 한림학사이며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 송나라가 남당을 공격할 때 언변이 뛰어난 그는 두 번이나 송나라 조정에 찾아와서 전쟁을 종결짓고 강화를 체결하자고 송태조 조광윤에게 요구했었다.

서현을 소환했을 때 조광윤은 엄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왜 그대는 일찍 이욱을 권유하여 투항하지 않았는가? 몇 년간 송군과 대치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희생을 자초했는가?」

서현도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남의 대신으로서 나라가 망했으니, 딴 말 마시고 어서 죽여주시오!」
그의 재능이 탐이 난 조광윤은 말을 받았다.

「정말 충신이로다. 유능한 자를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

그는 당장 조서를 내려 서현을 태자솔갱(太子率更)으로 임명했다.

 

후촉의 하급관리 왕저나 남당의 장계와 서현이나를 막론하고 그들은 모두 문인으로서의 재능에 의해 송나라 조정에서 권한 있는 관직을 갖게 되었고 조광윤으로부터 그들의 재능을 존중받았다.

또한 송태조 조광윤이 겉치레로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완전한 신하로 삼은 것은 실로 탄복할만한 일이다. 조광윤은 이와 같이 도(道)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문인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므로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예전과 오늘을 가리지 않으며 관직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으면서 유능한 문인들을 모두 등용함으로써 송나라의 번영을 가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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