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시 전쟁이란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한하여 일으켜야 한다.”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해 백성들을 전란의 피해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부득이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는 통일전쟁을 하면서도 외교(外交)와 병행해 계책(計策)을 활용하여 가능한 한 군사와 백성의 목숨을 아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가 황제로 있는 동안 다섯 나라를 평정했지만, 형남(荊南)과 남당(南唐)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했다.
북한(北漢)의 경우, 도성(都城)을 포위하고도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가 공성(攻城)명령을 내리지 않아 결국은 포위를 풀고 회군해야만 했다.
오월(吳越)과 장천(漳泉)은 아예 전쟁을 하지 않고 인덕과 위엄으로 스스로 복속케 하였다.
황제의 어좌에 앉은 것이 이미 현실이 된 이상 조광윤은 더 이상 국가대사의 처리에서 한사코 겸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군사, 정치의 책략을 구현하려 했다. 즉위한지 1년 내에 그는 두 군데의 절도사 반란지역을 진압해 후주의 옛 지배지역을 회복했다.
그러나 송태조는 당시의 송나라 지역만으로는 세상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고 황제의 위풍을 떨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천하를 다스릴 포부가 있는 한 장강(長江) 이남의 후촉이나, 북방의 북한과 같은 할거정권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하고 싶었으나 맹목적으로 전쟁을 발동하고 대량 살육을 감행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책략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전쟁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함으로써, ‘군사적 승리’와 함께 ‘정치적 승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다.
이렇게 하자면 통일된 전략사상이 있어야 하고 통일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어야 했다.
사실 송태조 조광윤은 이미 통일전쟁을 위한 충분한 재정을 비축했다.
우선 송나라는 111개 주(州)의 넓은 영토와 96만 세대의 인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남북의 할거정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송나라는 전투를 잘 하는 용맹스럽고 강한 군대를 확보하고 있었다.
조광윤의 어진 정치와 여러 해 동안 그의 지휘 하에 있던 군대는 이미 후주 시절에 북한정벌, 회남전투, 거란정벌 등 몇 차례의 큰 전쟁을 거쳐 전투력과 사기가 왕성하고 군기가 엄정하기 때문에 승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중국이 다시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할 역사적 추세가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당나라 중기에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발생한 이래 황하 이북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번진(藩鎭)에서 오대(五代)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할거정권이 수립되었는데, 송나라와 같은 강대한 정권이 수립되어 중국의 중심세력으로 형성됨으로써, 이에 따라 점차 할거국면에서 통일로 나아가려는 추세가 움트기 시작했다.
장강 이남지역에는 비록 많은 정권들이 있었지만 남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토가 작고 인구가 적어서 국력이 약했다. 연약한 나라들은 당나라 후기부터 중원(中原) 왕조에 귀순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말하자면 오월(吳越)을 등 많은 나라들이 생존을 위한 방법으로 중원왕조에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인심의 동향을 놓고 볼 때 장기간의 분열과 할거는 사회, 경제, 문화의 발전과 교류를 심각하게 저해했고, 사회 각 계층의 백성들에게 전쟁의 큰 재앙을 안겨주었다. 하나의 통일된 중국을 지향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적 추세가 되었다.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기적 욕망이나 공격성 또는 세상의 다양성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다툼을 가져오게 되는데, 개인적 다툼이 집단적으로 발전된 것이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은 국가나 집권자의 이익, 복수나 명예 등을 위해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전쟁은 전쟁이 아니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일으켜야 하며, 전쟁은 가급적 회피해야 하지만 일단 개전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역사는 승리자만이 쓸 수 있고 승리자의 문화유산만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태조 조광윤은 “오랜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겠다.”는 명분으로 중국통일전쟁을 수행하기로 국정의 목표를 정했다.
중국을 통일하는 전략적 방침은 정치적 동향의 큰 틀 안에서 수립되어야 했다. 각 나라의 정치적 동향을 정확히 읽고 해결책을 내놓아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조광윤은 자국의 정치, 군사, 백성의 상황에 대해서 상세히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타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른바 병법에서 말한 대로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아는 자는 백번 전쟁을 하여도 위태롭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위대한 통일전쟁을 위한 전략과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