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2)

제1절 선남후북(先南後北)의 통일정책 수립

마음속에 통일방침이 확립되자 조광윤은 구체적 실시방안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세는 이러했다. 북방에는 태원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있고, 서남에는 성도(成都)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후촉이 있고, 장강하류의 금릉(金陵) 일대에는 비교적 넓은 영토에 물자도 풍부했던 남당이 있고, 더 남쪽에는 항주(杭州)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오월이 있었다.

호북(湖北)의 강릉(江陵) 일대에는 형남 형남(荊南):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강릉(江陵)과 공안(公安) 일대의 지역이 있고, 낭주(朗州) 일대에는 호남이 있고,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에는 남한정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조광윤의 통일위업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당면과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쓰느냐?” 하는 것이었다.

후주 세종은 당초에 ‘선북후남(先北後南)’ 즉, 먼저 북벌을 시작해 거란이 점령하고 있는 연운16주를 수복해 거란과 북한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나아가 북한을 멸망시킨 다음, 다시 남방의 나라들을 통일하려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후주의 형부낭중 왕박(王僕) 왕박(王僕): 일부 기록에는 ‘왕박(王朴)’으로도 쓰여 있다.
당나라 말 906년에 동평(東平: 지금의 산동성 소재)에서 출생, 959년(후주 세종 6년)에 사망. 후주 세종에게 평변책(平邊策)으로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 건의. 후주의 형부낭중, 변경부유수, 추밀부사, 추밀사 등 중책을 역임.

은 『평변책(平邊策)』에서 「선근후원(先近後遠)」 즉 가까운 곳부터 먼저 공격하고 먼 곳은 나중에 공격하며, 「선이후난(先易後難)」 즉 쉬운 곳부터 공격하고 어려운 곳은 나중에 공격하며, 남쪽부터 공격하고 북쪽은 나중에 공격하자는 「선남후북(先南後北)」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먼저 남당을 탈취한 후 후촉을 탈취해 남방과 서방을 평정한 후, 병력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북한을 제압한 다음 마지막으로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 거란에 넘겨준 ‘연운(燕雲)16주’를 수복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실현 가능성이 매우 큰 방안이었다.

일찍이 조광윤도 세종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북한부터 공략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960년(태조1) 8월, 이균의 반란을 평정하고 택주, 노주를 탈환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조광윤은 승세를 몰아 북상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통일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한 만큼 “먼저 북한을 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한 조광윤은 북한과 가까운 지역의 관리로 있던 화주단련사(華州團練使) 장휘(張暉)를 불러 의견을 들어보았다.
장휘는 이렇게 말했다.

「택주와 노주에서 치른 전쟁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또 다시 급하게 북한에 출병을 시도한다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군대를 정비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 풍요로워진 후에 다시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 이 문제에 대해 장영덕(張永德)의 의견을 들어보았는데 그 역시 조광윤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북한의 군사는 젊고 용맹한 자들이며 또 거란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급히 치러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의 소견으로서는 해마다 유격대를 늘려 그들의 농사일을 교란하고 간간히 거란에 사람을 보내 그들의 지원을 단절시킨 다음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동감한 조광윤은 북상하여 북한과 결전을 벌이려던 계획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지혜주머니 조보(趙普)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다.

 

▶ 함박눈 내리는 밤에 조보(趙普)의 집을 찾다

조광윤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책사 조보를 찾아갔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밤, 변경(汴京)은 온통 뿌연 눈보라 속에 휩싸여 있었다. 조광윤은 눈길을 밟으며 조보의 집을 찾아갔다. 눈 내리는 한밤중에 불쑥 나타난 황제를 보고 깜짝 놀란 조보는 어리둥절했다.
조광윤이 솔직히 털어 놓았다.
「침대 이외의 것은 다 남의 것이니 잠을 이룰 수 없소.」
조보가 말했다.
「폐하는 신(臣)과 평변지책(平邊之策)을 상의하시려는 것입니까?」
조광윤이 말했다.
「그렇소, 먼저 북한(北漢)을 수복하려 하오.」
조보가 말했다.
「북한은 거란과 접해 있기 때문에 서쪽과 북쪽의 두 곳의 국경수비를 맡고 있습니다. 태원성을 함락하면 그 두 곳의 국경수비임무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태원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다른 나라들을 먼저 평정한 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언젠가는 함락하게 될 그 작은 땅 덩어리가 사라지기라도 하겠습니까?」
조광윤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짐(朕)의 생각이 바로 그거였소. 경(卿)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오.」
심사숙고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난 뒤에 조광윤은 남방부터 먼저 정벌할 책략을 정하고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설명했다.
「오대(五代) 이래 중국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국고와 곡물창고는 텅텅 비게 되었소. 먼저 후촉을 탈취하고 그 다음 형남, 호남, 남한, 남당을 공략하면 나라는 풍요로워질 것이오. 오늘의 강적은 거란뿐이오. 거란은 석경당이 연운16주를 떼어주고 난 이래 갈수록 중원왕조를 무시하고 있소. 황하 동부는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한을 공략하면 거란의 침범을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이오. 그러니 북한은 우리의 방패역할을 하도록 잠시 가만두었다가 우리가 부강해지면 공략하도록 합시다.」
이와 같이 송태조 조광윤은 조보와 다른 신하들의 의견과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현명한 황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