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3)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1. 형남(荊南)과 호남(湖南)을 일거에 평정

 

▶ 호남 가는 길을 빌려 형남을 무혈(無血) 평정

 

송태조 조광윤이 “위대한 중국통일대업을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공격대상을 어느 나라로 할 것인가?” 대신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니, 모두들 후촉(後蜀)이라고 대답했다.

후촉은 북쪽과 동남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실시해 일거에 함락해야 한다고 했다.

북쪽은 후주시기에 이미 조광윤의 군사전략에 힘입어 진(秦), 봉(鳳) 등 4개 주를 탈환했기 때문에 이 노선은 출병하기에 비교적 편리했다.

동쪽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삼국시기에 유비(劉備)가 사천(四川)에 들어갈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노선에는 두개의 비켜갈 수 없는 할거정권 형남과 호남이 있었다. 비록 이 두개 나라가 명의상으로는 이미 송(宋)에 귀순했지만, 그들은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자치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독립왕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후촉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먼저 형남부터 탈취해야 했다. 그래야만 동쪽에서 후촉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을 열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형남을 공격하자니 출병할 명분이 없어 일시에 조광윤은 고민에 빠졌다. 바로 이때 하늘이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호남의 주씨(周氏)정권에 갑자기 내전이 일어났다. 호남은 일찍이 송(宋)의 번진으로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호남왕 주보권이 사자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 송태조 조광윤은 즉시 호남의 인근지역인 형남으로 하여금 파병해 호남을 도와 반란을 일으킨 호남의 형주자사(衡州刺史) 장문표(張文表)를 진압할 것을 명했다.

이로부터 조광윤의 남방을 통일하려는 전략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963년(태조4) 1월, 조광윤은 산남동도절도사 겸 시중(侍中) 모용연소를 주장(主將)으로, 추밀사 이처운을 도감으로 하여 대군을 이끌고 양양(襄陽)에서 합류하도록 했다.

동시에 형남의 수병 3천명을 담주(潭州)로 이동시켜 공격에 가담해 호남을 지원하도록 했다. 조광윤은 또 태상경 변광범(邊光范)과 호부판관 등백(縢白)을 전운사(轉運使)로 임명해 모용연소의 대군의 후방 공급을 보장하도록 했다.

조광윤은 이번 호남 파병에서 아예 형남까지 평정하려는 생각으로 병마의 수량이나 후방공급은 호남에서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병법에서 “용병이란 궤술(詭術)을 피우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뜻은 “용병 자체가 바로 일종의 계략을 꾸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싸울 수 있으면서 못 싸우는 척하고, 싸우려 하면서 안 싸우는 척하며, 가까운 곳에 가려 하면서 먼 곳으로 가는 척하고, 먼 곳에 가려 하면서 가까운 곳에 가는 척한다.

적에게 작은 이익을 던져주고 그것을 유인하는 것”이다. 용병의 필요에 의해 조광윤은 모용연소와 이처운에게 자신의 계획을 남김없이 말해주었다.

「호남으로 출정하려면 반드시 형남 강릉(江陵) 강릉(江陵): 소왕국 형남(荊南)의 도성(都城)
의 길을 빌려야 하고, 그 곳을 사분오열(四分五裂) 시켜야 하네. 그런 다음 형남을 평정하시오.」

 전국(戰國)시대에 진(晋)나라는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었는데, 이 두 개의 소국(小國)은 나란히 붙어있어서 서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晋)나라는 우공(虞公)에게 뇌물을 주면서 “괵나라를 치고 싶은데, 길을 좀 빌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는 우나라의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군대를 돌려 우나라까지 멸망시켰다는 고사가 있다.

병법을 배우고 『좌사(左史)』를 읽은 적이 있는 조광윤은 이 두 장수에게 “길을 빌려 형남(荊南)을 멸망시킨다.”는 자신의 계책을 말해주었다. 모용연소와 이처운은 이에 대해 깊이 이해했다.

 

형남은 남방을 통일하는데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우선 탈취해야 할 지역이었다.

송(宋)이 건국되기 전에 형남은 줄곧 특이한 소국으로서 연호도 없고 임금도 없이 형남왕으로만 통했다. 형남왕 고보융(高保融)이 죽었을 때, 조광윤은 병부상서 이도(李濤)를 보내 조문을 표하도록 했다.
 
962년(태조3) 9월에는 고보욱(高保勖)을 형남절도사로 임명했다. 오래되지 않아 고보욱이 죽자 고보융의 장자 고계충(高繼冲)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송태조는 고계충의 승계를 인정하고 노회충(盧懷忠)을 형남에 사절로 보내기로 했다.

떠나기 전에 조광윤이 노회충에게 말했다.
「강릉의 사람 사는 모습과 산천의 지리를 다 알고 싶네.」

노회충은 형남에서 돌아오자 보고를 올렸다.
「고계충의 군대는 잘 갖추어져 있지만 활을 쏘는 병사는 3만 명에 불과합니다. 오곡은 잘 여물었지만 백성은 가혹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장사(長沙)와 통해 있고, 동으로는 건강(建康)에 닿아 있습니다. 서쪽에는 후촉이 있고, 북으로는 송조정(宋朝廷)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보면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습니다. 아주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조광윤은 길을 빌려 탈취하려는 계책을 세우게 된 것이다.

 

주보권을 지원하러 호남으로 파견된 송군이 양양(襄陽)에 도착한 후, 모용연소가 몸져 드러눕는 바람에 이처운이 ‘호남 가는 길을 빌려 형남을 탈취하려는 작전계획’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먼저 각문사(閣門使) 정덕유(丁德裕)를 형남왕 고계충에게 보내 황제의 뜻을 전달했다. 황제의 군사가 형남의 길을 빌리고자 하니 군량과 마초를 준비해 공급하라는 내용이었다. 고계충이 답장을 보냈다.

「백성들은 황제의 군사를 두려워하고 있나이다. 황군(皇軍)이 필요로 하는 군량과 마초는 되도록 만족시켜 드리겠나이다. 단지 성에서 백리 떨어진 곳에서 공급할 것이고, 강릉성 안에는 들어오지 마시기 바라옵니다.」

이처운은 군대를 이끌고 강릉에서 백리 떨어져 있는 형문(荊門)으로 들어갔다. 형남아내지휘사(荊南衙內指揮使) 양연사(梁延嗣)가 고기와 술로 황제의 군사를 위로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모용연소가 연회를 열고 그를 초대했다.

양연사는 송군에게서 강릉을 강점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자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껏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양연사가 한창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이처운은 비밀리에 3천 기마병을 이끌고 질풍같이 달려 강릉성에 당도했다. 송군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당황한 형남왕 고계충은 황급히 마중을 나가 강릉성의 북쪽에서 15리 떨어진 곳에서 이처운과 만났다.
 
이때 이처운은 여전히 이곳에 오게 된 사유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고계충더러 이곳에서 송군의 주장인 모용연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하고는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다.

고계충과 모용연소가 함께 강릉에 왔을 때, 송군은 이미 강릉 성안에 있는 요충지들을 다 장악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형남왕 고계충은 별 수 없이 모용연소의 거처에 와서 위패(位牌)와 3개 주, 17개 현, 그리고 14만 3,300세대의 호적부를 상납하고 왕권을 양도했다.

이와 같이 송나라 군대는 활 한대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릉을 강점하는 계획을 완수했다. 이는 조광윤의 원칙과 요구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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