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후촉(後蜀) 평정
형남과 호남 두 나라를 평정하고 그 토지와 인구를 송나라에 귀속시키자 국력은 더욱 강대해졌다.
이것은 조광윤이 후주의 땅을 인계 받은 기초 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낸 영토 확장이었으며, 본래의 후주 땅을 수복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길을 빌리는 책략’과 적을 선제 제압하는 계략의 성공은 조광윤으로 하여금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더욱 굳은 결심을 다지도록 했다.
이제 후촉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형남을 얻은 만큼, 다음은 당초의 계획대로 풍요로운 후촉이 공격목표가 되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에 의지해 있던 후촉은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방대한 병력에 비해 군사력은 약했다.
전촉(前蜀)의 뒤를 이어 농업과 양잠업을 발전시켜 물산이 풍요로웠으며, 문인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촉에는 중원(中原)에서 전란을 피해 풍족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온 수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동쪽의 오(吳), 남당(南唐)과 더불어 오대십국 시대 최고봉의 문화를 꽃 피웠다.
후촉왕 맹창(孟昶)은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수도 성도(成都)의 곳곳에 부용화(芙蓉花)를 심어 ‘부용성(芙蓉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주 세종은 조광윤의 군사적 지략을 빌어 후촉의 진(秦), 계(階), 성(成), 봉(鳳) 4개 주를 빼앗았기 때문에, 송나라는 형남지역과 함께 후촉을 양면에서 협공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송나라를 건국한 후 정치, 군사에 열중해 온 조광윤은 국경에 상황이 생길 때마다 상세한 상황파악에 주력했다.
후촉에서 사자가 오면 그는 매번 묻곤 했다.
「검외(劍外)에는 어떤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가?」
한번은 후촉에서 온 사자가 그에게 말했다.
「요즈음 성도에는 <고열(苦熱)>이라는 주산장(朱山長)의 시(詩)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한 구절이 이러하옵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 피할 데가 없는데 청량한 바람은 언제나 불어올까.”」
이에 근거해 조광윤은 후촉 백성들이 폭정에서 벗어나려 하고, 민의는 송군이 들어와서 후촉을 정벌해주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낙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것이 후촉을 정벌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이고 간접적으로는 학정에서 시달리는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963년(태조4) 4월, 송태조 조광윤은 화주(華州)단련사 장휘(張暉)를 봉주(鳳州) 단련사로 이동시켰다.
장휘는 봉주에 도착한 후 후촉으로 들어가는 산세와 하천에 대해 상세하게 탐사함으로써, 출병계획을 수립하는데 유용한 근거를 제공했다.
‘군사에 정통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정치에 정통한 군사가’로서의 조광윤은 전쟁을 하려면 훌륭한 전술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전(知戰)원칙’, 즉 “전장과 경유할 노선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후촉으로 들어가는 도로상황을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찍이 형남의 고씨정권에서 의관으로 봉사했던 목소사(穆昭嗣)는 송(宋)이 형남을 평정한 후 한림의관(翰林醫官)에 임명되었다.
조광윤은 여러 번 그를 만나 후촉의 지리에 대해 일일이 자문을 받았다.
목소사가 말했다.
「형남은 서천(西川), 강남(江南), 광남(廣南)이 합류하는 곳입니다. 형남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수로나 육로를 통해 후촉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조광윤은 후촉의 도로와 산세, 하천 등 지리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었으며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완벽한 지리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조광윤이 송(宋)나라를 세울 때 후촉왕 맹창은 이미 재위 26년이 되었다.
맹창은 재위 초기에는 신하들의 권한을 억제하고 민력을 절약하며 나라 일에 온 힘을 쏟아 붓는 기상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영토 확장의 야심을 갖고 관중(關中)일대를 정찰하고 후주를 공격하기 위해 ‘파시도(破柴都)’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동으로는 남당과, 북으로는 북한과 손을 잡고 함께 중원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맹창은 얼마 가지 않아 무절제한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그는 관현악과 가무에 도취되고 주야로 연회를 벌이면서 점차 정사에 무관심했고, 향락에 빠져 관중(關中)과 중원을 도모하려던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이때 새로이 건국한 송나라는 생기가 흘러넘치고 천하를 도모하기 위한 웅심을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