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송태조 조광윤은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오대십국 시기에 반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법을 무시하고 도덕과 윤리를 어지럽히는 통치자들을 증오했다. 송나라 이전의 중원(中原) 5개 왕조는 모두 이전 왕조의 법률을 답습하거나 자체로 법률을 제정했으므로 법도가 있는 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황제들은 남의 것을 답습하거나 모방했을 뿐 그들 자신에게는 법률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몸에 독재자의 본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그들은 자신이 바로 법이요, 살육이 바로 통치수단이었다. 노자는 일찍부터 전제의 폐단을 발견하고 법제관념을 주창했다. 그는 사건의 판결은 반드시 형법을 주관하는 사법부(司法府)에서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법관(司法官)이 아닌 자가 사건을 판결하고 법을 집행하면, 마치 기술 없는 자가 석공 대신 돌을 깎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석공을 대신해 돌을 깎는 자는 필연코 손을 다치게 된다. 오대(五代)시기의 통치자들은 천하의 주인행세를 하며 법 위에 군림해 사법부 대신 마음대로 형벌을 내리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니 어찌 손을 다치지 않을 수 있겠는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1. 통일법전 편찬 송나라는 봉건전제왕조에서는 보기 드물게 입법(立法)과 사법(司法)을 중요시했다. 송나라 건국초기 962년(태조3), 판대리사(判大理寺) 판대리사(判大理寺): 형법을 관장하는 관리, 지금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직위두의(竇儀)가 통일법전의 편찬을 건의했다. 「현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법전은 『대주형통(大周刑統)』 『대주형통(大周刑統)』: 후주(後周) 세종(世宗)이 제정한 법전을 인용한 것이나, 조목이 너무 잡다하고 법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사용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조광윤은 즉시 명을 내려 두의와 권대리소경(權大理少卿)인 소효(蘇曉) 등이 법전의 수정을 주관하도록 했다. 법치의식이 강했던 조광윤은 송나라 초기에 새로운 법전이 나오기 전에는 당나라의 『당율(唐律)』과 후주 세종이 제정한 『대주형법(大周刑法)』을 답습했다. 조광윤은 기본적으로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실천자였다. 도가는 자유분방한 것을 표방하지만 법제를 수호하는 데는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늘의 법망이 관대한 듯하나 죄인은 반드시 벌을 면치 못하는 법이다. 노자(老子)의 이름
제5절 공평한 조세정책당나라 때부터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한 이래 나라는 일부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이 조정에 필요한 물품을 양세로 환산해 납부하는 것을 허용했다. 오대(五代)의 각 나라에서는 이 방법을 시행했고, 송나라 초기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납부하는 필수품의 수량을 채우기 위해 관청에서는 흔히 백성들에게 강압적으로 물품을 할당해 바치게 했다. 이 문제점을 발견한 조광윤은 970년(태조11) 4월에 각 지방에서 마음대로 필수품을 환산해 할당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반포했다. 「각 지방에서 양세(兩稅)로 환산하는 필수품은 현지의 생산물이 아닌 경우에는 할당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견사, 견직물, 삼베, 향료, 깃털, 화살대, 피혁, 젓가락, 뿔 등은 산지(産地)에서 2년간 사용할 것을 조달하며, 과다한 부담을 안겨 백성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필수품을 환산해 할당하는 것’이란 나라에서 조달하려는 필수품이 현지에 없을 경우, 현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으로 환산하여 대체하는 것이다. 지방관리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세금부담을 가중시키는 비리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 문제들을 감안해 조광윤은 특별히 “현지의 생산물
제5절 공평한 조세정책4. 백성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과세정책 나라가 세금을 징수할 때 관리들이 더 이상 백성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송태조 조광윤은 과세제도에 대한 일대 개혁을 실시하기로 했다. 법적으로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는 폐단을 근절하고 제도화된 납세 메커니즘을 세우기로 했다. 968년(송태조 9년)에 그는 이러한 규정을 내놓았다. 「주정부의 관리가 현에 속하는 조세를 징수할 때는 공목관(孔目官) 공목관(孔目官): 주(州), 현(縣)의 내외아서관(內外衙署官)으로 재무를 주관 에 의해서만 청구할 수 있다. 주에서 납세감독관을 임명하는 방법을 폐지하고, 녹사참군(錄事參軍)에서 호적을 검증하고 판관(判官) 판관(判官): 절도사(節度使), 관찰사(觀察使)의 신하(臣下) 이 납세를 책임진다.」 이 규정으로 인해 국가가 세금을 징수할 때 제도적으로 상호견제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주와 현이 결탁하여 세금을 횡령하는 폐단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 초기에 우보궐(右補闕) 양주한(梁周翰)은 상소(上疏)를 올렸다. 「나라가 넓다 보니 혜택이 미치지 못한 곳도 있고 예의법도가 구비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곳까지 널리 보살펴
제5절 공평한 조세정책3. 누진세 부과: 가난한 자는 적게, 부유한 자는 많이 과세 송태조 조광윤은 국가재정수입 확보를 위해 독특한 정책들을 실시했다. 민생의 원기를 회복해 주기 위한 정치환경을 보장하고 재원을 확대해 재정수입을 확보하려 했다. 조광윤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보다 더 어려운 과제들을 풀어나가야 했다. 조광윤은 통계상의 어려움으로 경제현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주로 농민의 상황에 따라 경제정책을 수립했다. 이른바 ‘재정수입’이란 세금징수를 가리킨다. 송나라는 당나라 양세법을 답습했고 인구와 농토를 결합시킨 세법(稅法)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세법은 폐단이 있었다. 대부분의 지주(地主)들이 전답면적을 속이는 방법으로 탈세했던 것이다. 문제점을 파악한 조광윤은 “인구수에 다른 과세에 집착하지 않고 토지의 겸병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것은 인구수에 맞춰 세금을 징수하는데 집착하지 않고 빈부에 따라 격차를 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조광윤의 ‘애민사상(愛民思想)’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대개의 농민들은 재산이 별로 없고 빈곤하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수입을 이들에게 의존해 확보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착취
제5절 공평한 조세정책조광의의 장인이며 천웅군절도사였던 부언경(符彦卿)은 세금을 징수할 때 선여를 챙기는 방법으로 거리낌 없이 백성들을 착취하여 원성을 크게 샀다. 이것을 알게 된 조광윤은 대노하여 즉시 파면시켰다. 그는 곧 상참관(常參官)을 각지에 파견하여 징세사업을 감독케 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손실을 막게 하는 동시에 탐관오리들의 착취로부터 백성을 보호했다. 이부낭중(吏部郎中) 윤식(閏式)은 조정에서 하양(河陽)의 여름세금 징수를 감독하라고 파견했을 때 선여를 챙겼다. 그는 1말(10되)에서 5리터나 더 많이 계산하는 바람에 고발을 당했다. 조광윤은 즉시 사람을 파견해 진상을 규명하고 그가 비록 많이 징수한 부분을 사적으로 챙기지 않고 조정에 납부했다 할지라도 이는 백성의 이익을 위하는 조광윤의 뜻에 어긋나는 처사이므로 즉각 강등(降等) 처분을 내렸다. 우위솔부관(右衛率府官) 설훈(薛勛)은 상영창고(常盈倉庫)의 세금을 감독할 때 창고의 관리와 결탁해 말〔斗〕로 더 많이 받는 수법으로 백성에게 해를 끼쳤다. 조광윤은 이 일을 알고 설훈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를 기주(沂州)로 유배 보냈으며, 결탁한 창고의 관리는 사형에 처했다. 위의 윤식, 설훈 두 사람의 직
제5절 공평한 조세정책 1. 공평과세를 위한 새로운 통일도량형 실시 나라의 경제정책을 제대로 시행하려면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해야 한다. 조광윤은 도가(道家)의 인덕(仁德)사상과 유가(儒家)의 인애(仁愛)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백성들에게 이익 되는 것이라면 그는 다 받아들여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용했다. 건국 초기에 유가경전에서 합리적인 내용을 받아들인 조광윤은 새로운 통일도량형을 제정해 전국에 반포하도록 조령을 내렸다. 오대(五代)이래 할거정권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왕조가 빈번히 바뀌면서 전국의 도량형은 무질서하게 사용되어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조광윤은 즉위 초 각지에서 각기 다르게 사용하던 도량형을 폐지하고, 새로운 저울과 말을 제조해 전국에서 일제히 사용하게 하고 위조품을 엄히 단속하였다. 나라에서 통일도량형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되자 주현(州縣)에서 세금을 징수할 때 도량형으로 간계를 부려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착취하던 폐단을 방지할 수 있었다. 후촉에서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때 두 종류의 말(斗)을 사용했다. 백성들이 납세할 때는 큰 말을 쓰고, 나라에서 백성에게 공급할 때는 작은 말을 사용했다. 나라에서 조세를 징수할 때
제4절 3대강 대운하 건설1. 변하(汴河) 운하 건설 송나라 초기에 운하건설을 추진한 것은 송태조 조광윤의 넓은 식견에서 비롯된 중요한 조치였다. 당시 회남지역에 연속 풍년이 들어 곡식창고들이 넘쳐나자 조운수로를 통해 이 곡식들을 경성으로 수송했다. 한번 수송하는데 80일이 걸렸으니 적어도 한 해에 2~3회 정도 수송할 수 있었다. 어느 해 경성의 곡식창고에는 반년을 공급할 수 있는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초소보(楚昭輔)는 선박 운항속도를 높여 수송일정을 1년에 4회로 늘렸다. 그리하여 7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장강과 회수 일대의 식량 10만석을 차질 없이 운송함으로써 경성의 급한 식량상황을 호전시켰다. 만일 원활한 수로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대규모의 식량수송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저수지의 물로 양안의 농토를 관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한강(漢江)에 해당하는 변하(汴河)를 중심으로 개발한 이 수로들은 또 여러 강물의 물살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여 가뭄과 침수를 방지할 수 있었고, 선박도 다닐 수 있게 되어 백성들은 많은 이익과 편리함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역대의 다른 제왕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큰 업적이었다.
제4절 3대강 대운하 건설“물은 모든 그릇에 담을 수 있되 고정된 형태가 없다. 대중이 싫어하는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노자(老子)의 물에 대한 소박한 견해이다. “물은 만물에 이로운 것이고 만물과 다투지 않는다.” 인간이 있기 싫어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바로 다투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물을 의인화하여 다투지 않는 도덕관념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가(道家)사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온 송태조 조광윤은 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리건설에서 큰 업적을 이룩한 제왕들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도 현재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등 주요 강을 둘러싸고 ‘대운하사업’이니 ‘4대강 개선사업’이니 하여, 여야 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물 관리’가 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손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사업을 특정 정당이 선거공약으로 했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는 정치적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다거나, 반대로 특정 정권의 홍보수단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업이 과연 국민에게 도움이 되느냐, 우리나라의 기후와 지리, 환경 등 제반 여건에 맞느냐,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꼭 필요한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10)한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회남군(淮南軍)의 군량을 방출하여 이재민을 구제한다면 군대의 뒷심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 틈에 남당의 공격을 받게 되면 회남땅은 틀림없이 잃게 될 것입니다.」 이에 심륜이 반박했다. 「군부대는 회남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회남에 주둔하고 있는 것인데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면 남당의 공격을 받는 것보다 더 처참해질 것입니다.」 한 조신이 말했다. 「만일 군량을 구제용으로 썼다가 재해가 지속되어 이재민들이 갚지 못한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입니까?」 심륜이 대답했다. 「나라에서 국고를 방출하여 이재민을 구제해 주면 자연히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오곡이 익을 때까지 재해가 계속될 리 있겠습니까? 회남의 기근이 급박하니 폐하께서 속히 용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다스리려면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治世莫若愛民>」이것은 조광윤이 대전(大殿)의 병풍에 새겨 놓은 말이다. “태원의 북한을 얻지 못할지언정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송태조의 지론이었다. 하물며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백성을 어찌 구제하지 않고 죽게 둘 수 있겠는가? 회남 이재민을 구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