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회남군(淮南軍)의 군량을 방출하여 이재민을 구제한다면 군대의 뒷심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 틈에 남당의 공격을 받게 되면 회남땅은 틀림없이 잃게 될 것입니다.」
이에 심륜이 반박했다.
「군부대는 회남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회남에 주둔하고 있는 것인데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면 남당의 공격을 받는 것보다 더 처참해질 것입니다.」
한 조신이 말했다.
「만일 군량을 구제용으로 썼다가 재해가 지속되어 이재민들이 갚지 못한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입니까?」
심륜이 대답했다.
「나라에서 국고를 방출하여 이재민을 구제해 주면 자연히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오곡이 익을 때까지 재해가 계속될 리 있겠습니까? 회남의 기근이 급박하니 폐하께서 속히 용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다스리려면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治世莫若愛民>」이것은 조광윤이 대전(大殿)의 병풍에 새겨 놓은 말이다. “태원의 북한을 얻지 못할지언정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송태조의 지론이었다. 하물며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백성을 어찌 구제하지 않고 죽게 둘 수 있겠는가? 회남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해 조광윤은 “상환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고 과감하게 심륜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즉시 군량미를 회남 백성들에게 대출해 줄 것을 명령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넓은 도량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자 하늘은 청명해졌고 나라로부터 구제를 받아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난 회남백성들은 더 많은 땅을 갈고 더 많은 곡식을 심으면서 생산에 몰두했다. 회남의 농민들은 조정의 은혜에 감사했고 마음으로부터 황제를 찬양했다. 송나라에는 심륜과 같이 ‘민본사상(民本思想)’을 가진 신하들이 많았으니 이는 백성의 복이요 황제 조광윤이 솔선수범한 결과였다. 송나라 초기에 실시한 군량미로 이재민을 구제하는 대책은 실로 백성에게 이로운 방법이었다. 그 이후 조광윤은 대재앙이 발생할 때면 이 방법으로 급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968년(태조9) 수해가 발생하여 많은 집들이 파괴되고 전답이 매몰되었다. 조광윤은 피해지역 백성들에게 구제금을 내려줄 것을 명하고 동시에 조세를 면제해줌으로써 이재민들이 다시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게 했다. 조광윤은 만사를 제쳐놓고 오로지 백성을 위하고 이재민을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이때에도 군량미를 구제미로 동원했다. 974년(태조15) 6월에 하중부(河中府), 강주(絳州) 등지에 큰 가뭄피해가 발생해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군량미 3만석을 방출해 이재민을 구제하게 했다.
그는 또 전례 없는 새로운 구제(救濟)방안을 고안했다. 그것은 바로 긴급구조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972년(태조13) 6월에 황하(黃河)는 전주(澶州)에 이어 양무(陽武)에서도 범람했다. 포효하는 거센 물살은 제방을 무너뜨리고 거침없이 마을과 전답을 매몰시켰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뿔뿔이 피난을 떠났다. 조광윤은 옛 선현들과 마찬가지로 황하를 다스리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고 제방이 터질 때마다 강적을 대하듯 복구작업에 임했다. 이번 범람에 조광윤은 5만 명의 군대를 투입했고 조한(曹翰)을 지휘관으로 임명해 작전하는 태세로 터진 제방을 보수하도록 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싸워 제방을 원상 복구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자연재해를 당했을 때 군대가 나서서 복구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하겠다.
그리고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상황의 보고에 대해서도 중시했다. 970년(태조11) 7월에 그는 각지의 피해상황에 대한 보고를 지연하지 않도록 특별조령을 내렸다. 봄에는 4월을 넘기지 말고 여름에는 7월을 넘기지 말도록 규정함으로써, 조정에서 신속하게 판단하고 효과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제 때에 보고를 하지 않거나 구제시기를 놓친 관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징벌했다. 971년(태조12) 11월에 전주(澶州)의 황하 제방이 터졌을 때 인근의 몇 개 현의 전답이 모두 침수되었다. 전주의 관리가 수해 사실을 제때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광윤은 즉시 전주 지주(知州)로 있던 자신의 외숙부인 두심조(杜審肇) 두심조(杜審肇): 송태조 조광윤의 어머니 두태후(杜太后)의 남동생의 관직을 파면하고 사제(私第) 사제(私第): 나라에서 관직에 따라 내려준 관저가 아닌 개인소유의 집로 돌아가게 했고, 통판(通判)인 요서(姚恕)는 조보의 건의에 따라 사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