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민위방본(民爲邦本)’의 국가경영철학 구현 <24>

제4절 3대강 대운하 건설

1. 변하(汴河) 운하 건설

 

송나라 초기에 운하건설을 추진한 것은 송태조 조광윤의 넓은 식견에서 비롯된 중요한 조치였다. 당시 회남지역에 연속 풍년이 들어 곡식창고들이 넘쳐나자 조운수로를 통해 이 곡식들을 경성으로 수송했다. 한번 수송하는데 80일이 걸렸으니 적어도 한 해에 2~3회 정도 수송할 수 있었다. 어느 해 경성의 곡식창고에는 반년을 공급할 수 있는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초소보(楚昭輔)는 선박 운항속도를 높여 수송일정을 1년에 4회로 늘렸다. 그리하여 7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장강과 회수 일대의 식량 10만석을 차질 없이 운송함으로써 경성의 급한 식량상황을 호전시켰다. 만일 원활한 수로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대규모의 식량수송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저수지의 물로 양안의 농토를 관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한강(漢江)에 해당하는 변하(汴河)를 중심으로 개발한 이 수로들은 또 여러 강물의 물살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여 가뭄과 침수를 방지할 수 있었고, 선박도 다닐 수 있게 되어 백성들은 많은 이익과 편리함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역대의 다른 제왕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큰 업적이었다.

 

2. 혜민하(惠民河) 운하 건설

 

조광윤이 이 거대한 운하건설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관리를 적재적소에 잘 기용한데서 기인된다. 이 관리가 바로 후주 때 남당에서 투항한 대장군 진승소(陳承昭)였다. 조광윤 수하에는 용맹한 장수 3천 명에 지략가가 8백 명이 있었으나 수리사업을 아는 자가 없었다. “물고기는 깊은 연못에 잠겼다가 가끔은 물가로 나온다.<魚潛在淵 或在于諸>”고 했던가? 남당의 패장 진승소가 마음에 든 조광윤은 그를 혜민하 보수공사의 책임자로 임명해 변경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운하를 건설하게 했다. 혜민하 준설은 조광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 강의 남쪽에 있는 영천(穎川)은 곡창지대로서 후주 때부터 경성에 식량을 공급하는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남쪽에서 영수(穎水)와 합류해 회하(淮河)로 흘러드는 혜민하는 남쪽으로는 장강(長江), 한수(漢水)와 연결되고, 서남쪽으로는 남양(南陽)과 이어지기 때문에 경제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번에 준설하는 구간은 변경에서 동남쪽에 있는 통허진(通許鎭)까지였다. 혜민하를 탐사해보니 강물이 너무 적어 준설해도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판단한 진승소는 혜민하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수원을 찾아 나섰다. 그는 지형을 답사하면서 정지(鄭地)의 지세가 비교적 높고, 정지 서부의 하류가 그곳을 지난 다음 모두 동남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만일 물고를 약간만 터준다면 능히 동북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었다. 이번 탐사의 결론은 정확했다. 그는 정지 서부의 민수(閔水)를 신정(新鄭)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혜민하로 흘러들게 했다. 또 손수(潠水)의 물이 민수와 합류하게 물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혜민하의 물은 크게 불어나게 되었고, 남쪽의 진주(陳州), 영주(穎州) 지역을 거쳐 회하(淮河)와 합류하게 함으로써, 경성(京城)과 장강, 회하 구간의 조운(漕運)수로를 형성했다.
한편, 조광윤은 남당(南唐)을 평정하려 했으나 강남에 강대한 수군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대안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진승소가 송나라에도 잘 싸울 줄 아는 수군을 창건하자고 제의했다. 그리하여 961년(태조2) 9월, 조광윤은 수천 명의 병사를 징모하여 변경 서쪽 주명문(朱明門) 밖에 돌로 쌓은 견고한 저수지를 파고 혜민하의 물을 끌어들인 다음 그곳에서 수군훈련을 시작했다. 공사가 완공된 후 그는 친히 저수지를 둘러보고 병정들에게 상금을 하사했다. 이 부역에 조광윤은 백성을 인부로 징발하지 않았는데, 하나는 백성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이며, 셋째는 이 공사가 특별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부역이 끝난 후 망루가 있는 배 수백 척을 건조하고 수첩군(水捷軍)을 조직해 수상훈련을 실시했다. 이 조치는 후에 남당을 평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수군이 있고 장강과 회하로 통하는 운하가 있게 된 송나라는 남당을 아주 쉽게 평정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3. 오장하(五丈河) 운하 건설

 

오장하는 변경에서 시작해 동으로 흐르는 강줄기다. 옛부터 이 수계(水系)는 여러 차례 물길이 바뀐 황하의 영향을 받아 수없이 물길이 바뀌고 토사가 침적하고 소멸되곤 했다. 그리고 물줄기가 많고 물이 고갈되었다가 다시 불어나는 등 변덕스러움 때문에 사람들은 이 수계를 이용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변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수수(睢水)라고 하는 강이 사수(泗水), 회수(淮水)와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장하 준설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조광윤은 혜민하가 소통되자 또 진승소에게 오장하를 준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장하는 토사가 침적되고 토사를 제거한다 해도 수량이 적어 여전히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다른 강물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장하를 이용하려면 끌어들일 강물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명을 받은 진승소는 이를 위해 현지답사에 나섰다. 답사를 마친 진승소는 경수(京水)와 삭수(索水)는 다 오장하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강줄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듣고 난 조광윤은 영양에서 동쪽의 변경까지 약 백 여리 구간에 물길을 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경수와 삭수를 먼저 변경으로 끌어들이고 변하를 지나 동쪽의 오장하로 흘러들게 했다. 이리하여 강물이 넘쳐흐르게 된 오장하는 다시 동북의 대운하와 이어지면서 동북 조운(漕運)수로가 개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