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유종(有始有終)’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물은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도, 나라도, 민족도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 우리나라도 몇 번씩이나 외적으로부터 국권을 침탈당했지만 다행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 나라가 오래 존속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우선 오케스트라(orchestra)와 같이 훌륭한 지휘자와 그를 마음으로 따르는 국민이 하나가 되어 하모니(harmony)를 이루어 ‘번영(繁榮)’을 꽃피워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라’라는 커다란 배의 항로를 결정하는 데는 무엇보다 조타수(操舵手)의 역할이 중요하다. 물길과 풍향과 환경을 잘 아는 조타수가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배가 안전하고 옳은 방향으로 운항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나라의 조타수’는 중국의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라고 생각한다. 송태조 조광윤은 좋은 운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씨앗을 뿌리고 정성들여 가꾸었다. 성문수(成門樹) 선생이 갈파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수종자수과론(隨種子收果論)을 원용해 조광윤을 그려 본다. 그는 성실(誠實)의 씨를 뿌려 ‘황제(皇帝)’라는 열매를 맺었
조병세 폴란드대 교수· 시사1 논설위원장, 폴란드 TV와 인터뷰지난 5월 6일부터 9일까지 나흘 동안 온 세계의 관심 속에서 개최된 북한의 제7차 노동당대회에 관해 폴란드 트르밤(Trwam)TV와 인터뷰를 가졌다. 폴란드는 우리와 지정학적(地政學的) 유사점이 많아서, 남북한정세 변화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GvNWX_DXYNs (2016. 5. 11 방송, 시작 후 9분 40초부터 3분간) <질문1> 북한은 36년만에 노동당대회를 개최했는데,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북한이 최근 도발적으로 핵과 미사일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유엔안보리(UNSC)로부터 해외 금융, 무역, 상업, 항행(航行) 등 전방위적으로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어 “세계화시대에 세계로부터 완전 고립”하게 되자, 내부결속과 체제안전을 다지려는 안간힘으로 본다. <질문2> 김정은은 이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가? 김정은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명실상부하게 당군정(黨軍政)과 국민을 통치하는 “김정은시대”를 열고자 했고, 그래서 민주국가에서는 기대조차 하기 어려운 만장일치로 “노동당위원장”이라는 최고
제5절 송태종이 된 첫째 동생 조광의(趙光義)2. 촉영부성(燭影斧聲): 송태조의 갑작스런 죽음 송태조 조광윤은 황제로 즉위하여 17년 되던 해 초겨울 만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세상에 ‘금궤지맹’이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조보와 조광의가 날조한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조광윤이 뜻밖에 죽음을 당한 후 황제의 자리를 그의 아들 조덕소가 아니라 동생 조광의가 이어 받은 사실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무인출신이라 남달리 건강했던 조광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은 사건을 후세에서는 ‘촉영부성(燭影斧聲)’ 또는 ‘부성촉영(斧聲燭影)’이라 불렀다. 이는 ‘촛불 흔들리는 그림자와 도끼소리’라는 뜻으로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후세의 사가들은 조광윤의 죽음 역시 태종 조광의에게 혐의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조광윤의 죽음에 대해서는 송나라 중기에 조정의 대신이나 환관들과 교제가 잦았던 승려 문영(文瑩)이 송대(宋代)의 잡다한 이야기를 모아 쓴 야사(野史) 『속상산야록(續湘山野錄)』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976년(태조17) 10월 20일 밤 송태조 조광윤은 태청각(太淸閣)에 올라 천기를 살펴보았는데 북
제5절 송태종이 된 첫째 동생 조광의(趙光義)1. 금궤지맹(金櫃之盟) 961년(태조2) 두태후의 병환이 위중할 때 조광윤과 형제들은 병상 앞에서 조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의 유언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두태후의 유언은 태종의 뒤를 이은 진종(眞宗) 4년 『태조실록(太祖實錄)』을 1차 수정할 때 처음으로 등장한 기록으로 ‘금궤지맹(金櫃之盟)’ 또는 ‘금궤예맹(金櫃預盟)’이라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시 태후는 조광윤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 알고 있소?」 이때 효자 조광윤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두태후가 말했다. 「나는 늙어서 죽는데 울 필요가 뭐 있겠소?」 그러자 송태조 조광윤이 눈물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선조와 태후께서 많은 공덕을 쌓은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두태후가 말했다. 「어찌 내가 쌓은 공덕 덕분이라 하겠소? 그대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후주의 군주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오. 어린아이가 어떻게 천하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이것이 후주의 강산을 우리가 얻게 된 원인이오. 나라에 듬직한 군주가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오. 장차 그대의 황위는 동생 광의(光義)에게 넘겨주어야 하고, 광의는
제5절 송태종이 된 첫째 동생 조광의(趙光義)송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의문을 남기며 죽은 후 그의 아우 조광의가 송태종(宋太宗)으로 즉위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조광의(趙匡義)’였는데, 조광윤이 황제가 되자 피휘(避諱)관례에 따라 ‘조광의(趙光義)’로 바꾸었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어서는 ‘조경(趙炅)’으로 다시 바꾸었다. 조광의는 939년 11월 20일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 황제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 변경성 북문 부근의 군영 준의영(浚義營)관사에서 조홍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두태후가 조광의를 회임했을 때 “신인(神人)이 태양을 받들어 그녀에게 주는” 태몽으로 꾸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형 조광윤과 마찬가지로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는데, 방안에 붉은 빛이 가득했으며 주위에 신비한 향내가 감돌았다고 한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자신이 태어난 곳에 계성원(啓聖院)이라는 절을 지었는데, 금(金)나라에 의해 북송(北宋)이 망할 때 불탔다고 한다. 조광의는 어렸을 적부터 생김새에서부터 성격이나 행동이 형 조광윤과 대조적이었다. 생김새는 광윤은 골격이 크고 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체격인 반면, 광의는 아담한 체격에 여성적으로 생겼다. 형 광윤의 눈은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청렴한 재무관리 전문가 심륜(沈倫) 변경(汴京) 출신 심륜(沈倫)은 ‘심의륜(沈義倫)’이라고도 부르며, 그는 학식이 뛰어나서 청년시절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후한 시절에는 진섬(鎭陝)대장군 백문가(白文珂)의 참모로 있었다. 후주 세종 초 변경지부(汴京知府) 겸 부유수(副留守)로 있던 구거윤(咎居潤)이 칩거해 있는 심륜을 조광윤에게 추천해 그의 막부에서 재물관리를 능력껏 수행했다. 그는 재물관리를 치밀하게 잘 하면서도 재물을 일체 탐하지 않고 오직 책 모으기를 탐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 전쟁터에서 노획한 재물을 가지고 오지 않고 수레에 책만 가지고 오는 사람은 조광윤과 남당 평정할 때 주장을 맡았던 조빈(曹彬) 그리고 심륜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송태조 조광윤이 조빈에게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을 때, 그는 심륜을 ‘책을 좋아하는 청렴한 관리’라고 추천하여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도록 하였다. 962년(태조3) 봄, 회남(淮南)지역에 일대 흉년이 들어 농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호부랑중 심륜이 오월(吳越)에 사신으로 갔다가 변경(汴京)으로 돌아오
호주 멜버른(Melbourne)은 빅토리아주(Victoria State) 수도(首都)로 인구는 시드니(Sydney) 다음가는 400만명 정도이며,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선정된 도시이다. 호주 양대(兩大) 도시인 시드니와 멜버른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시드니가 밝고 힘찬 “불타는 20대 미녀”라면, 멜버른은 아늑하고 “중후한 40대 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버른 야라강(Yarra River) 건너편 아름다운 시내 모습 지난 4월 시드니대학에 공개특강하러 호주에 간 기회에 <빅토리아주 한인노인회> 백봉남회장님을 뵈러 멜버른에 갔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노인회에서 요청하여 <세계 고령화현상과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현상>에 대한 특강을 했다. 이날 참석한 30여명의 노인들 모두가 밝고 진지하게 듣고 열심히 적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아직까지도 이민생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영어를 원어민강사에게 열심히 배우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조병세 폴란드대학교수, 멜버른 한인노인회에서 “세계 고령화현상” 특강 멜버른 한인노인회는 1990년말 “60세 이상 노인들이 친목도모, 건강증진, 복지향상, 생활편의 제공과 후세들에게 한국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명예롭게 부재상으로 은퇴한 유희고(劉熙古) 유희고는 송주(宋州) 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경전을 공부하고 무예와 병법을 즐겨 익혔으며, 마술(馬術)과 활쏘기가 뛰어난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후당 명종 때 진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후진의 창고관리(倉庫官吏)로 있었고, 후한 때는 노씨현령(盧氏縣令)으로 있었다. 후주 건국 후 그는 호주방어추관((毫州 防禦推官), 진주(秦州)관찰판관을 역임했다. 유희고는 후진, 후한, 후주 3개 왕조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재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조광윤이 귀덕절도사로 있을 때 그의 출중한 재능을 알고 막부로 불러들여 절도판관(節度判官)을 맡도록 했다. 조광윤의 깊은 신임을 얻은 유희고는 송나라 건국 초기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승진되었다. 그 후 사법기구를 일대 개혁한 후 송태조가 유희고를 형부시랑(刑部侍郞)에 임명한 것을 보면 그가 유희고를 얼마나 중시했는가 알 수 있다. 송태조는 다시 그를 권지진주(權知秦州)로 파견해 서부국경의 분쟁을 처리하도록 명했다. 그가 진주에 당도해 보니 국경지대에 외적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문관 출신으로 명장이 된 이처운(李處耘) 산서(山西) 노주(潞州) 출신 이처운은 어릴 때부터 병법을 익혀 군사재능이 뛰어났다. 후한 대장군 절종완(折從阮)이 그를 참모를 불러들였다. 절종완이 후주에 항복한 후 이처운은 여전히 그의 참모로 있었다. 절종완이 죽으면서 유서로 전전도지휘사 조광윤에게 추천하여 그의 막부에서 도압아(都押衙)를 맡으면서부터 상하간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처운은 조광윤이 출정할 때마다 수행하면서 군사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진교병변 때 그는 조광윤의 참모로서 병변을 획책하고 참여한 장본인이었다. 조광윤이 군을 진교역(陳橋驛)에 주둔시켰을 때, 이처운은 각 군영을 돌며 군심과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는 대다수 장병들이 북상하려 하지 않고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군의 동정을 파악한 후 즉시 조광의를 찾아가 긴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급히 그들이 존경하는 조보를 찾아가서 함께 이러한 동향에 대한 대처방안에 대해 상의했다. 그는 조보, 조광의 등과 함께 병변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장병들과 함께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했다.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이처운은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청렴한 문관 유온수(劉溫叟) 유온수는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신동으로 이름이 자자했다. 성장해 후당의 관리로 등용되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후진시기에는 한림학사에 지제고(知制誥)로 있었으며, 후한시기에는 가부낭중(駕部郎中)이 되었다. 그리고 후주 때는 지공거(知貢擧)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다. 유온수가 5개 왕조에서 관운이 형통했던 것은 기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공정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충직한 성품에서 기인된 것이다. 어느 왕조에서든지 그는 직책을 다하고 또 억울함을 당해도 인내하고 변명하지 않았다. 후주의 지공거로 있을 때 그는 과거시험에서 진사 16명을 합격시켰다. 그런데 누가 세종에게 유온수가 인재를 뽑는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권력에 의해 사익을 도모했다고 모함했다. 이에 세종은 그를 파면시키고 합격시킨 16명 진사 중에서 12명을 낙방시켰다.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했다. 후에 두의(竇儀)가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을 때 세종이 낙방시켰던 사람들이 다시 합격함으로써, 그가 결코 사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