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예롭게 부재상으로 은퇴한 유희고(劉熙古)
유희고는 송주(宋州) 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경전을 공부하고 무예와 병법을 즐겨 익혔으며, 마술(馬術)과 활쏘기가 뛰어난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후당 명종 때 진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후진의 창고관리(倉庫官吏)로 있었고, 후한 때는 노씨현령(盧氏縣令)으로 있었다.
후주 건국 후 그는 호주방어추관((毫州 防禦推官), 진주(秦州)관찰판관을 역임했다. 유희고는 후진, 후한, 후주 3개 왕조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재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조광윤이 귀덕절도사로 있을 때 그의 출중한 재능을 알고 막부로 불러들여 절도판관(節度判官)을 맡도록 했다. 조광윤의 깊은 신임을 얻은 유희고는 송나라 건국 초기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승진되었다.
그 후 사법기구를 일대 개혁한 후 송태조가 유희고를 형부시랑(刑部侍郞)에 임명한 것을 보면 그가 유희고를 얼마나 중시했는가 알 수 있다.
송태조는 다시 그를 권지진주(權知秦州)로 파견해 서부국경의 분쟁을 처리하도록 명했다.
그가 진주에 당도해 보니 국경지대에 외적의 침범이 극심했다. 국경 밖 유목민들은 끊임없이 진주로 침입해 교란했고, 그들은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 처단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양동정책을 펼쳤다. 유목민 수령에게 송조정의 은혜를 입게 하고 또 그들의 자식들을 진주에 집결시켜 인질로 삼았다.
이리하여 국경의 환란은 점차 평정되었고 서북 변경(邊境)은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공을 치하해 조광윤은 그를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임명했다.
972년(태조13)에 그를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했다. 유희고는 973년(태조14)에 참지정사 겸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직함으로 퇴임해 벼슬의 생애를 원만하게 마쳤다.
▶ 우직하며 효도를 아는 진정한 무장 당진(黨進)
송태조의 측근에는 늘 충성스럽고 현명한 신하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독특한 무장 당진(黨進)이 있었다. 그는 산서(山西) 삭주(朔州) 사람으로 유년시절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웠다.
후진시기에 원수(元帥)인 두중위(杜重威)의 눈에 들어 그의 경호원이 되었다.
힘이 천하장사이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군에서 승승장구해 후주 때에는 금군철기(禁軍鐵騎)도우후가 되었다. 조광윤은 964년(태조5)에 그를 보군도지휘사를 대리(代理)하게 했고, 968년(태조9)에 보군도지휘사로 임명했다.
전쟁터에서 용맹무쌍한 당진은 송나라 통일전쟁에서 여러 번 훌륭한 전공을 세웠다.
969년(태조10) 송태조가 북한을 정벌하기 위해 친정했을 때, 송군은 태원(太原)을 포위했으나 북한이 완강하게 사수해 오랜 시일이 지났어도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한번은 북한 대장군 양업(楊業)이 성을 나와 당진의 진영을 습격했다.
당진이 용맹스럽게 싸웠기 때문에 양업이 패하고 북한군은 성안으로 물러갔다. 당시 퇴각하던 양업은 당진의 병사들이 성 안으로 돌진할까봐 감히 성문을 열지 못하고 성루 위의 병사들이 내려뜨린 밧줄을 타고 겨우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를 떠나기만 하면 당진은 일개 무인에 불과했다. 일자무식이고 산수(算數)도 모르며 말솜씨도 없고 기억력도 나빴다.
비록 보군도지휘사의 신분이지만 수하에 병사가 몇 명이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송태조가 부대의 상황에 대해 묻기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황제를 알현할 때 부하에게 부대의 병사, 마필, 병기에 관한 숫자를 홀판(笏板)에 적게 했다. 과연 송태조가 그의 부대상황에 대해 물었다.
해당 숫자를 똑똑히 기억하지 못한 당진은 홀판을 들여다봤으나 뭐가 뭔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홀판을 높이 추켜들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상주했다.
「부대에 관한 숫자는 다 이 패(牌) 위에 쓰여 있사오니 폐하께서 친히 보시옵소서.」
그의 우직한 모습에 송태조 조광윤도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충성스럽고 마음이 따뜻한 당진은 천하에 다시없는 효자로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그는 매일 어머니를 위해 먹을 것을 샀고 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자들을 미워했다. 한번은 거리를 지나던 그는 한 젊은이가 고깃덩이를 들고 새매에게 먹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에 거슬린 그는 다가서자마자 다짜고짜 새매를 빼앗아들고 끈을 싹둑 잘라 매를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러한 불효막심한 놈이 있는가? 고기 살 돈이 있으면 부모에게 효도나 할 것이지 이 빌어먹을 짐승에게 먹이다니...!」
이때 경성의 치안책임을 맡고 있던 대장군으로서 그는 특명을 내려 육식하는 사나운 날짐승을 기르는 것을 엄금했다.
당진이 우직하고 예의가 없으며 일자무식이었으나 송태조는 그에게 외교임무를 맡긴 적이 있었다.
당시 송태조는 이간책(離間策)을 이용해 남당왕 이욱(李煜)으로 하여금 남당의 제일 용장 임인조(林仁肇)가 암암리에 송나라에 투항한 것으로 의심하게 하려 했다.
그래서 이욱은 한림학사 서현(徐鉉)을 파견해 공물을 들고 변경(汴京)에 가서 그 허실을 탐문하도록 했다.
서현이 변경에 도착하자 재상 조보가 송태조에게 아뢰었다.
「서현은 남당의 유명한 선비입니다. 언변이 뛰어나고 상대방 의중을 헤아리는 재능이 탁월한 자입니다. 우리 측에서도 반드시 말솜씨가 좋은 관리를 선발해 상대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대국의 체면에 손상되지 않게 할 수 있고, 그들이 탐지하려는 비밀이 새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송태조 조광윤은 말했다.
「보군(步軍)도지휘사 당진이 적합할 것 같소.」
이에 조보가 반문했다.
「당진은 말재주도 없고 또 일자무식인 무인에 불과한데 서현과 같은 학식 있는 문인을 상대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웃지 않겠습니까?」
조광윤이 웃으며 말했다.
「당진은 본래 예의가 없는 사람이니까 실례할 것도 없지 않겠소?」
송태조는 정말로 당진을 접견사로 임명했다. 이것은 일종의 병법(兵法)이었다.
명을 받은 당진은 남당의 사신 서현을 접대했다. 서현도 송나라에서 직급이 자신과 비슷한 도지휘사를 파견한데 대해 만족해했다.
당진은 이틀 동안 서현과 함께 다녔다. 사방관(四方館)에서 안배한 대로 변경의 명승고적을 유람하고 연회를 베풀어 술과 고기로 환대했다. 그런데 정작 서현이 알고 싶어 하는 조정 내부의 관심 있는 정책에 대해 당진은 정말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동문서답하며 뚱딴지같은 소리나 내뱉곤 했다.
서현이 그에게 물었다.
「우리 강남에 임인조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는데 장군께서 알고 계신지요?」
당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임인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서현을 접대하기 전에 조광윤이 그에게 남당에 임인조라는 용맹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진이 말했다.
「황제께서도 그는 용맹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지 모르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발로 옆에 있는 큰 돌을 냅다 걷어찼다. 그 커다란 돌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하늘 높이 날아갔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서현은 더 이상 감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당진과 함께 지낸 서현은 가치 있는 정보를 하나도 얻지 못한 채 남당으로 돌아갔다.
학식이 없는 당진은 정책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지만 그는 매우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고 송태조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다.
당진은 조광윤에게 충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의리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집이 가난하여 후진의 절도사 두중위(杜重威)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진은 그의 은혜를 늘 잊지 않았다. 당진이 송나라 금군의 대장군이 되었어도 두중위가 죽어 보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두중위의 자손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자가 있으면 매달 녹봉에서 일부를 떼어 도와줌으로써 두중위의 은혜에 보답했다.
용맹하고 무예가 뛰어난 당진은 조광윤처럼 말단병사에서 한걸음씩 승진해 금군의 대장군이 되었다. 이는 송태조 조광윤의 배려도 있었지만 그의 노력이 더 큰 작용을 한 것이다.
그는 10년 동안 송나라 금군을 이끌어 나갔는데 이는 충성심과 용맹함, 의리를 지키는 품성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