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22)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 문관 출신으로 명장이 된 이처운(李處耘)

 

산서(山西) 노주(潞州) 출신 이처운은 어릴 때부터 병법을 익혀 군사재능이 뛰어났다.
후한 대장군 절종완(折從阮)이 그를 참모를 불러들였다. 절종완이 후주에 항복한 후 이처운은 여전히 그의 참모로 있었다.
절종완이 죽으면서 유서로 전전도지휘사 조광윤에게 추천하여 그의 막부에서 도압아(都押衙)를 맡으면서부터 상하간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처운은 조광윤이 출정할 때마다 수행하면서 군사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진교병변 때 그는 조광윤의 참모로서 병변을 획책하고 참여한 장본인이었다.
조광윤이 군을 진교역(陳橋驛)에 주둔시켰을 때, 이처운은 각 군영을 돌며 군심과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는 대다수 장병들이 북상하려 하지 않고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군의 동정을 파악한 후 즉시 조광의를 찾아가 긴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급히 그들이 존경하는 조보를 찾아가서 함께 이러한 동향에 대한 대처방안에 대해 상의했다. 그는 조보, 조광의 등과 함께 병변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장병들과 함께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했다.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이처운은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로 임명되어 조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960년(태조1) 10월, 이중진이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처운을 병마도감으로 임명했다.
송태조는 친정하여 이중진의 반란을 평정한 후 그를 권지양주(權知揚州)로 임명했는데, 이때부터 문관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 뜻을 품고 있는 이처운은 당면과업을 수행하는데 유능했고 조광윤을 만난 후부터 늘 공훈을 세워 보답하려 했다.
권지양주로 임명되자 그는 한껏 재능을 발휘해 양주지역을 잘 다스려 나갔다.
이중진의 잔혹한 통치 하에서 혹심한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산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중진이 백성들에게 집세를 높게 받았던 것을 파악하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 감면해 줄 것을 요구해 그들을 무거운 집세부담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는 또 농업생산에 힘써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격려했다. 그러한 정책에 의해 해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백성들은 의식주가 풍부해졌다. 이리하여 양주에서 이처운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962년(태조3) 조광윤이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하고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을 때, 백성들은 모두 아쉬운 눈물을 흘렸고 그를 전별하기 위해 연일 길을 막고 작별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963년(태조4) 정월에는 조광윤이 이처운을 도감(都監)으로 임명해 호남의 장문표(張文表)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그때 조광윤은 그에게 “호남으로 갈 때 형남의 길을 빌려 아예 두 나라를 평정하라.”고 지시했다.

이처운은 이번 전쟁은 송나라 건국 후 처음으로 도전하는 통일전쟁인 만큼 그는 꼭 원만히 수행하리라 결심했다.

대군이 양양에 당도했을 때, 주장(主將)이던 모용연소가 연회를 베풀어 형남의 양연사(梁延嗣)를 초대했다.

그때 이처운은 경기병(輕騎兵) 3천을 이끌고 한숨에 달려 강릉성에 들어가 성안의 군사요지를 점령함으로써, 송나라는 피한방울을 흘리지 않고 형남을 통일할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치주자사(淄州刺史)로 부임했다가 순직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처운의 충성심과 재능을 기리어 선덕(宣德)절도사로 추서했다.

 

▶ 진퇴를 아는 현명한 재상 여여경(呂余慶)

 

유주(幽州) 출신 여여경은 후진, 후한, 후주 3개 왕조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가 후주 보주(洑州)의 녹사참군(錄事參軍)으로 있을 때 전연(澶淵)절도사로 있던 시영(柴榮) 시영(柴榮): 후일 후주의 세종. 오대시기에 가장 영명한 군주가 되었다.

이 그의 재능에 대해 늘 칭찬했고 이에 조광윤이 귀를 기울였다. 954년(세종1) 조광윤은 여여경을 찾아내어 막부의 종사(從事)로 추천했다.
 
이때 그는 조광윤과 같은 인덕을 갖춘 영웅을 모시게 되어 마음속으로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후에 조광윤이 전전도점검이 되고 귀덕절도사를 통솔할 때 그는 관찰판관으로 임명되었다.

960년 조보 등과 함께 진교병변을 획책한 여여경은 조광윤이 등극한 후 급사중(給事中) 급사중(給事中): 문하성(門下省) 관리로서 칙명의 기초에 미흡한 점이 있는 경우, 이를 바로잡거나 논박(論駁)할 수 있었다.
과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다.
여여경은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광윤은 그를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승진시켜 전국의 토지, 호적, 부과세와 재정지출을 관장하도록 했다.
963년(태조4) 형남과 호남 지역을 통일한 후 송태조는 그를 권지담주(權知潭州)로 임명했다. 담주에서 여여경은 조광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사형수들의 죄를 감면해 주고 노역형을 받은 자들을 방면하며 수천 명의 늙은 병사들을 고향으로 보내 생산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새로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그는 탁상공론을 하지 않고 질박하고 겉치레 없이 백성들이 실익을 얻게 함으로써, 조광윤은 963년에 여여경을 부재상급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했다.

 

964년(태조5)에 송태조는 후촉을 평정했다. 그런데 송군의 대장군 왕전빈 등이 공을 내세워 횡포를 부리고 군기가 해이해져 마음대로 민가의 자녀를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며 밤낮으로 술판을 벌이고 군무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그곳 백성들은 이에 항거했고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나 왕전빈은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위급한 상황에 직면한 송태조는 여여경을 옛 후촉의 수도 성도(成都)의 시장(市長)에 해당하는 ‘성도지부(成都知府)’로 임명해 국면을 만회하기를 기대했다.

여여경은 성도로 달려가자마자 군기를 과감하게 바로 잡기 시작했다. 그는 왕전빈 수하에 법을 어긴 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변경(汴京)으로 압송했고 법을 어긴 병사들에 대해서는 모조리 그 자리에서 참수해 오만하고 방자한 군사들의 약탈행위를 조기에 수습했다.
 
그리고 여여경은 성도의 정상적인 생활질서를 바로 잡기 시작하고 시장(市場)을 복구하고 개방했다. 그때 한 의약품가게가 성도거리에서 개업을 했는데 여여경은 친히 가서 축하해 주었다.

한창 개업식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서 술 취한 한 군교가 칼을 들고 상인을 위협하면서 재물을 약탈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여여경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 군교를 체포해 대중이 보는 앞에서 참수했다.

송태조 조광윤의 사랑을 받은 대신으로서 그는 이와 같이 강력한 조치를 취해 성도부(成都府)를 말끔히 정비하여 민심을 호전시키고 사회치안을 바로 잡았으며 어지럽고 위태로운 국면을 안정시켰다.

 

송태조 조광윤은 여여경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972년(태조13)에는 또 그를 형남과 검남(劍南)의 전운사(轉運使)에 임명했다.

973년(태조14) 6월에 그는 도당동의정사(都堂同議政事)로 승진되었다. 그해 9월에 여여경은 병환으로 그의 참지정사(參知政事) 직을 해임해 줄 것을 요구했고 조광윤의 동의를 얻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공직을 명예롭게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