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렴한 문관 유온수(劉溫叟)
유온수는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신동으로 이름이 자자했다.
성장해 후당의 관리로 등용되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후진시기에는 한림학사에 지제고(知制誥)로 있었으며, 후한시기에는 가부낭중(駕部郎中)이 되었다.
그리고 후주 때는 지공거(知貢擧)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다. 유온수가 5개 왕조에서 관운이 형통했던 것은 기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공정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충직한 성품에서 기인된 것이다. 어느 왕조에서든지 그는 직책을 다하고 또 억울함을 당해도 인내하고 변명하지 않았다.
후주의 지공거로 있을 때 그는 과거시험에서 진사 16명을 합격시켰다. 그런데 누가 세종에게 유온수가 인재를 뽑는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권력에 의해 사익을 도모했다고 모함했다.
이에 세종은 그를 파면시키고 합격시킨 16명 진사 중에서 12명을 낙방시켰다.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했다.
후에 두의(竇儀)가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을 때 세종이 낙방시켰던 사람들이 다시 합격함으로써, 그가 결코 사적으로 봐 준 것이 아니라 엄격하고 실력대로 인재를 뽑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유온수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군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 밤늦게까지 공무를 본 어사중승 유온수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궁궐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조광윤이 궁 안의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명덕문(明德門)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조광윤이 갑자기 결정한 일이어서 유관부처에 통보하지 않았다. 이를 본 유온수는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성루에 오르려는 황제의 행적을 그에게 고하도록 지시했다.
이튿날 그는 조정에서 송태조를 알현할 때 이렇게 간했다.
「황제가 비상시에 등루하시면 종래의 관습에 따라 용서해 줄 것은 용서해 주어야 하고, 황성의 제 장병들은 상을 내려 줄 것을 바랍니다. 신(臣)이 폐하의 행적을 고하게 한 것은 대중에게 폐하는 평상시에 등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황제가 즉흥적인 행동을 적게 하여 군사나 백성들에게 폐 끼치는 일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며 조광윤은 그의 간언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유온수는 성품이 온후했지만 청렴 강직한 관리였다.
규정상 어사중승은 매달 1만문의 찻값을 쓸 수 있고 모자라면 몰수한 장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근원이 깨끗지 못한 장물의 사용을 꺼려해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십여 년간 어사직에 있으면서 조정의 행정을 감찰하고 사방의 문서, 장부를 점검하며 탄핵안건을 상주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로서 그 위엄과 권한이 대단했지만, 뇌물을 받은 적이 없으며 권력에 의해 사익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변경윤(汴京尹) 조광의는 유온수가 청렴하다는 얘기를 듣고 시험해 보려고 사람을 시켜 그에게 50만 은전을 보냈다.
유온수는 그가 황제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보낸 은화를 거절할 수 없어 집무실의 서쪽 방에 보관하게 하고 관리더러 돈궤를 봉인하도록 했다.
그 이듬해 중양절(重陽節)에 조광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을 시켜 유온수에게 손잡이에 옻칠한 희귀한 부채를 보내 주었다. 그는 여전히 서쪽 방에 봉인해 보관하도록 했다.
심부름한 자가 지난번의 봉인도 여태 뜯지 않은 것을 보고 돌아가서 조광의에게 보고했다. 조광의는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내가 보낸 것도 감히 안 쓰는 양반이 다른 사람의 것이야 더 말할게 있겠는가? 내가 보낸 은화를 받아 준 것은 나의 체면을 고려해 준 것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봉인을 뜯지 않은 것이오. 그의 이러한 절개는 정말 보기 드문 것이오.」
유온수는 또 효도로 유명하다. 오대(五代) 이래 예의가 훼손되었으나 그는 예의를 빈틈없이 지켰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를 맞은 그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대하고 모든 예의를 갖추었으며 더운 여름에도 정장을 하고 계모를 만나곤 했다. 그는 가정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병환으로 유온수는 여러 번 직무에서 물러나게 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송태조 조광윤은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정에서 그처럼 온후하고 정직하며 어사중승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병환과 노쇠한 몸으로 계속 직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했다. 유온수가 죽은 후 유관 부처에서 새 어사중승을 임명할 것을 상주했으나 조광윤은 깊이 생각하며 말했다.
「온수(溫叟)처럼 순수하고 온후한 사람만이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