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궤지맹(金櫃之盟)
961년(태조2) 두태후의 병환이 위중할 때 조광윤과 형제들은 병상 앞에서 조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의 유언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두태후의 유언은 태종의 뒤를 이은 진종(眞宗) 4년 『태조실록(太祖實錄)』을 1차 수정할 때 처음으로 등장한 기록으로 ‘금궤지맹(金櫃之盟)’ 또는 ‘금궤예맹(金櫃預盟)’이라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시 태후는 조광윤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 알고 있소?」
이때 효자 조광윤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두태후가 말했다.
「나는 늙어서 죽는데 울 필요가 뭐 있겠소?」
그러자 송태조 조광윤이 눈물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선조와 태후께서 많은 공덕을 쌓은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두태후가 말했다.
「어찌 내가 쌓은 공덕 덕분이라 하겠소? 그대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후주의 군주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오. 어린아이가 어떻게 천하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이것이 후주의 강산을 우리가 얻게 된 원인이오. 나라에 듬직한 군주가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오. 장차 그대의 황위는 동생 광의(光義)에게 넘겨주어야 하고, 광의는 광미(光美)에게 넘겨야 하며, 광미는 그대의 아들 덕소(德昭) 덕소(德昭): 조광윤의 차남. 장남이 일찍 죽어서 조광윤처럼 차남이면서도 장남 노릇을 했다.
조광윤은 4남 6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 덕수(德秀)와 3남 덕림(德林)은 어려서 죽었고, 막내 4남은 덕방(德芳)이다. 6녀 중 3명은 일찍 죽었고, 소경(昭慶), 연경(延慶), 영경(永慶)공주가 있었다.
에게 넘겨야 하오.」
조광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꼭 어머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태후는 다시 조보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 일을 기록해 두시오.」
그리하여 조보는 두태후의 유언을 기록하고 그것을 금궤에 보관했다. 이것이 바로 송나라 역사에서 유명한 ‘금궤지맹(金櫃之盟)’ 금궤지맹(金櫃之盟): 일본 학자 축사아장(竺沙雅章)이 쓰고 대만 학자 임걸빈(林傑斌)이 옮긴 『조광윤전(趙匡胤傳)』에 의하면, 후일 태종이 된 동생 조광의가 형인 조광윤으로부터 황위를 승계 받는 과정이 석연치 않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나중에 재상 조보(趙普)와 짜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두태후가 유언을 하는 자리에 조보와 조광의는 없었다고 적고 있다.
이다.
‘형의 뒤를 동생이 잇고 <兄終弟及>, 나라에 듬직한 군주가 있는 것은 ‘사직(社稷)의 복(福)’이라고 한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금궤지맹이 사실이라면 효자인 송태조 조광윤은 어머니 두태후의 말에 절대 복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많이 있다.
축사아장(竺沙雅章)의 『조광윤전(趙匡胤傳)』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의하면 금궤지맹은 조보와 조광의가 날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두태후가 유언을 남기던 자리에 조보가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두태후가 유언을 때 조보는 재상이 아니라 겨우 추밀부사(樞密副使)라는 한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금궤지맹 이야기는 조광윤이 죽은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광의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광의가 태종이 되어 조보를 다시 재상으로 불렀을 때 그가 태종에게 얘기해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조광윤이 갑자기 죽은 ‘촉영부성(燭影斧聲)’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혐의를 받고 있는 조광의가 황위승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후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조보와 조광의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황위옹립에 뜻이 없는 조광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진교병변을 획책해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황제를 만든 야심가이며 책략가들인 것이다.
셋째는, 형이 아우에게 황위를 물려주던 선례는 혼란했던 오대(五代)시기에 흔히 있었던 일로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송태조 조광윤이 천하를 거의 통일하고 안정된 평화시기에 굳이 동생에게 황위를 넘겨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두태후가 죽을 때 조광윤은 36세로 후계를 얘기할 나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광윤이 60세를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때 그의 아들 조덕소(趙德昭)는 황위를 이어받기 가장 좋은 나이인 35세가 된다. 실제로 조광윤이 갑작스레 죽었을 때 조덕소는 황제가 되기에 충분한 26세였던 것이다.
넷째, 두태후유언이 사실이라면 송나라 역사에서 태종 이후 후대에서도 형이 동생에게 그리고 동생은 다시 형의 장자에게 황위를 넘겼어야 마땅한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으며, 동생이 황위를 계승한 것은 조광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 유언장의 증인은 조보 혼자뿐이고, 거기에는 달랑 “신보기(臣普記)” 즉, “신하 조보(趙普)가 기록함.”이란 의미로 조보의 서명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 같은 유언장은 조보가 언제라도 혼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