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촉영부성(燭影斧聲): 송태조의 갑작스런 죽음
송태조 조광윤은 황제로 즉위하여 17년 되던 해 초겨울 만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세상에 ‘금궤지맹’이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조보와 조광의가 날조한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조광윤이 뜻밖에 죽음을 당한 후 황제의 자리를 그의 아들 조덕소가 아니라 동생 조광의가 이어 받은 사실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무인출신이라 남달리 건강했던 조광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은 사건을 후세에서는 ‘촉영부성(燭影斧聲)’ 또는 ‘부성촉영(斧聲燭影)’이라 불렀다.
이는 ‘촛불 흔들리는 그림자와 도끼소리’라는 뜻으로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후세의 사가들은 조광윤의 죽음 역시 태종 조광의에게 혐의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조광윤의 죽음에 대해서는 송나라 중기에 조정의 대신이나 환관들과 교제가 잦았던 승려 문영(文瑩)이 송대(宋代)의 잡다한 이야기를 모아 쓴 야사(野史) 『속상산야록(續湘山野錄)』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976년(태조17) 10월 20일 밤 송태조 조광윤은 태청각(太淸閣)에 올라 천기를 살펴보았는데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날씨가 청명해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날씨가 급변해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함박눈과 우박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랴부랴 태청각에서 내려와 변경윤(汴京尹)으로 있는 동생 조광의를 침궁(寢宮) 만세전(萬歲殿)으로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후사(後事)를 부탁했다고 한다. 침궁 밖에서 호위하던 환관과 궁녀들이 보기에는 촛불에 그림자가 흔들리고 조광의가 몇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피하면서 무엇인지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술을 끝낸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궁 밖에는 눈이 수북이 쌓였다.
조광윤은 도끼로 눈을 찍으며 조광의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잘 한다! 잘 해...!!」
이어 그는 허리띠를 풀고 잠에 들었으며 코고는 소리가 벽력같았다. 그날 밤에 조광의는 황궁에 머물렀고 새벽 네 시경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환관과 궁녀들이 달려가 보니 황제는 이미 죽어있었다.
조광의는 즉각 형의 영구(靈柩) 앞에서 황위에 올라 태종이 되었다. 이로써 송태조 조광윤의 아들인 조덕소와 조덕방은 황제가 될 기회가 없어졌다.
그리고 조광의는 전례 없이 태종으로 즉위한 당년에 연호를 송태조의 ‘개보(開寶)’에서 ‘태평흥국(太平興國)’으로 바꿨다.
원래 연호는 이전 제왕의 위엄을 존중하기 위해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부터 새로운 연호를 시작하는 것이 원칙인데, 조광의는 976년 10월 20일 조광윤이 죽고 그 해가 한 달 반도 남지 않았는데, ‘개보’를 쓰지 않고 976년 당년부터 ‘태평흥국’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형인 조광윤의 황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유명한 사마광(司馬光)이 쓴 『속수기문(涑水記聞)』에 의하면 내용이 다르다.
이에 따르면, 976년 10월 20일 밤 송태조가 만세전(萬歲殿)에서 별세했다. 이미 때는 심야 두시 경이었다.
송황후는 환관 왕계은(王繼恩)을 4남 진왕(秦王) 덕방(德芳)에게 보내 즉시 입궁해 황위를 계승하도록 명했다.
그런데 왕계은은 실권자 조광의에게 의지해 자기이익을 보호받으려는 생각에서 덕방에게로 가지 않고 곧장 진왕(晋王) 조광의(趙光義)에게로 갔다.
어쩌면 사전에 조광의가 환관을 매수해 미리 짠 각본이었는지도 모른다. 왕계은이 황망히 진왕부(晋王府)에 도착하니 입구에는 이미 의관(醫官)인 좌압아(左押衙) 정덕현(程德玄)이 와 있었다.
왕계은이 그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의관 정덕현이 말했다.
「한 반시간 전쯤 누가 와서 진왕(晋王)이 급한 병에 걸렸다고 고함을 쳐서 황급히 달려온 길이오.」
그러던 차에 마침 진왕 조광의가 나타나서 세 사람은 눈 덮인 길을 밟으면서 급히 황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송황후는 왕계은과 마주치자 물었다.
「덕방은 어찌 되었소?」
그러나 송황후는 왕계은과 함께 나타난 진왕(晋王) 조광의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애걸했다.
「우리 모자의 목숨은 진왕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조광의가 말했다.
「우리 함께 부귀를 누립시다. 걱정하지 마시오.」
10월 21일 아침, 조광의는 조광윤의 영구(靈柩) 앞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 사건은 제삼자(第三者)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증명할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천고의 의문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믿을만한 기록인『송사(宋史)』의 「태조본기(太祖本紀)」에는 이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계축일(癸丑日) 저녁, 황제께서 만세전(萬歲殿)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50세이시며, 대전(大殿)의 서쪽 계단에 안치했다.」
이로써 송태종 조광의는 ‘촉영부성’이라는 의문을 남기면서 그의 형을 죽인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광의는 자신의 장자가 안전하게 황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토록 자상하게 아껴주었던 형 의 자식들마저 핍박해 덕소는 979년(태종4)에 자결하고, 덕방은 981년(태종6)에 원인도 모른 채 앓다가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 광미마저 984(태종9)년에 죽게 함으로써, 태종은 즉위한지 8년 안에 그의 어머니가 ‘금궤지맹’의 유언을 통해 황위계승자로 거명했다던 사람들을 말끔히 제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북송이 끝날 때까지 계속 조광의의 직계후손이 황위를 독점했던 것이다.
이는 실로 권력의 무상함과 잔인함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촉영부성(燭影斧聲)’ 사건으로 조광윤이 죽을 때 조광의는 38세였고 조광윤은 50세였다.
조광의 자신과 조보가 은밀히 진교병변을 획책해 형을 황제로 만들어 주었는데, 자기 덕분에 황제가 된 형이 세상물정 모르고 너무 오랫동안 보위(寶位)를 지키고 있어 정작 주동적 역할을 한 자신에게 언제 황제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생겼을 것이다.
조광의는 형이 50세가 되어도 보위를 내놓을 기미가 없으면, 진왕부(晋王府)의 막강한 참모진과 재력을 동원해 제2의 병변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미리 작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촉영부성(燭影斧聲)’이 발생하기 전까지 조광윤(趙匡胤)이 무대에 섰던 스타(star)이고 동생 조광의(趙匡義)가 각본가 겸 연출가였다면, 마침내 연출가 자신이 무대에 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황제가 된 조광의는 978년(태종3) 1월 한림학사 이방(李昉) 등 여러 학자에게 명하여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케 하여 2년 후인 980년(태종5) 9월에 50권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편수관을 일일이 독대하여 자료를 제시하면서 보충하거나 수정하도록 간섭했으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도록 했다.
실제로 『태조실록』에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인명, 지명이나 내용도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촉영부성(燭影斧聲)’도 이런 연유로 다만 한 줄로 기록하게 하여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편수관 중에서 이지(李至)는 “눈병이 났다.”는 이유로 사관(史官) 직을 그만두었고, 편수관 장필(張佖)은 스스로 “자신은 옛 남당의 신하로서 송조(宋朝)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고 겸양하면서 사표를 냈다.
그리하여 결국 장박(張泊)과 송백(宋白) 등이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장박은 오래지 않아 『태조실록』편찬의 공로로 부재상인 참지정사에 올랐으나, 그 후 다시는 국사편찬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살펴본다면, 금궤지맹과 ‘촉영부성(燭影斧聲)’은 결국 당대의 야심가 조광의와 책사 조보의 작품이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