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25)

제5절 송태종이 된 첫째 동생 조광의(趙光義)

송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의문을 남기며 죽은 후 그의 아우 조광의가 송태종(宋太宗)으로 즉위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조광의(趙匡義)’였는데, 조광윤이 황제가 되자 피휘(避諱)관례에 따라 ‘조광의(趙光義)’로 바꾸었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어서는 ‘조경(趙炅)’으로 다시 바꾸었다. 조광의는 939년 11월 20일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 황제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 변경성 북문 부근의 군영 준의영(浚義營)관사에서 조홍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두태후가 조광의를 회임했을 때 “신인(神人)이 태양을 받들어 그녀에게 주는” 태몽으로 꾸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형 조광윤과 마찬가지로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는데, 방안에 붉은 빛이 가득했으며 주위에 신비한 향내가 감돌았다고 한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자신이 태어난 곳에 계성원(啓聖院)이라는 절을 지었는데, 금(金)나라에 의해 북송(北宋)이 망할 때 불탔다고 한다.

 

조광의는 어렸을 적부터 생김새에서부터 성격이나 행동이 형 조광윤과 대조적이었다.

생김새는 광윤은 골격이 크고 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체격인 반면, 광의는 아담한 체격에 여성적으로 생겼다. 형 광윤의 눈은 홀꺼풀이었으나, 동생 광의의 눈은 쌍꺼풀이었다.

광윤은 시문을 짓는 일보다는 무예를 좋아하는 활달한 영웅형이었으나, 광의는 무예보다 시문을 좋아해 많은 문집을 남긴 선비형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조홍은이 책을 구해 오면 광의에게 먼저 주었다고 한다.

광윤은 어질고 후덕하고 외향적인 보스형(boss-type) 인물이었으나, 광의는 냉철하고 계획적이며 야심만만한 재사형(staff-type) 인물이었다.

광윤은 공부보다는 무예를 좋아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 청소년시절 한때 부모의 걱정을 사기도 했으나, 광의는 늘 부모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영민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조홍은과 두씨부인은 광의를 총애했다고 한다.

조광윤은 이러한 형제간의 뚜렷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생 조광의를 끔찍이 아꼈다.

후주의 장군시절 조광윤은 조광의를 군에 입대시켜 장교로 키웠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그를 전전도우후로 승진시켜 군에서 가장 젊은 고위장군이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조광윤은 광의가 23세 되던 해 그를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변경윤(汴京尹)을 시켜 자신이 죽은 976년까지 15년간 그 자리를 지키게 했다.

조광윤은 동생 조광의가 출정할 때마다 조보(趙普)가 수행하게 했고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때인가 조광의가 병에 걸렸을 때 조광윤은 쑥뜸에 불을 붙여 주었다.

조광의가 살이 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하자 조광윤은 자신의 몸에도 뜸을 태우며 동생과 아픔을 나누었다.
 
조광의는 진교병변 때 조광윤이 후주를 교체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을 때, 군심과 돌아가는 상황을 통찰하고 조보, 이처운 등과 은밀하게 획책하여 조광윤에게 황포(黃袍)를 걸치게 함으로써 오대(五代) 말기에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를 이룩했다.

어느 날 송태조 조광윤은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거리낌 없이 조광의를 칭찬했다.
「진왕(晋王) 진왕(晋王): 조광의(趙光義)은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니 앞으로 태평성세를 이룰 것이오. 그 복덕은 짐(朕)이 따를 수 없을 것이오.」
이를 보면 조광윤이 이미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서 조광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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