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6)군을 다스리는 두 번째 방법은 또 합리적이고 안전하게 병력을 배치하는 데서 구현된다. 봉건 가부장제의 전제체제 하에서 황제는 금군의 최고통솔자이며 금군은 사실상 황제의 호위병이며 경성을 지키고 출정과 수비를 위한 파수병이다. 그러나 금군은 20만 병력을 갖고 있어 황제가 절대적 통솔자라고 할지라도 이 대군을 어떻게 배치하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송태조 조광윤은 금군을 배치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병변문제와 지방할거의 가능성을 먼저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20만 금군의 절반은 경성(京城)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지방에 분산 배치했다. 그리고 경성의 절반은 또 상호 견제하는 원칙에 따라 경성과 그 부근 지역을 3개 방어구역으로 나누어 병력을 배치했다. 황성 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경성 내에 금군 호위병력을 배치했으며, 경성 밖에 수십 리 되는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렇게 하여 금군의 정예부대인 전전사 소속의 병력을 제어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광윤은 “설사 경성에 경보가 울린다손 쳐도 황성 안에는 이미 수만 명의 정예군이 있는 것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주로 정예부대에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5) 2. ‘병권통제(兵權統制)시스템’으로 병변(兵變) 예방 병법은 이렇게 말했다. “미묘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신비스러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고로 적의 행동은 나의 지배를 받게 된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러한 은폐방법을 많이 이용했다. 그는 이 병법을 이용해 전쟁에서 백전백승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교묘한 것은 군을 다스리는데 이 병법을 융통성 있게 적용한 것이었다. 소리 없이 타인이 군을 지배할 수 없게 하고 또 군대의 강력한 전투력을 보장했던 것이다. 조광윤은 세 가지 방법으로 군을 다스렸다. 첫 번째 방법은 전쟁을 개시할 때 출정 직전에 주장(主將)을 지정하되 3개 군사기구의 책임자인 장군을 쓰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당과의 전쟁에서는 선휘남원사 겸 위성군절도사 조빈(曹彬)을 주장으로 임명했다. 후촉과의 전쟁에서도 임시로 충무절도사 왕전빈(王全斌)을 주장으로, 시위보군도지휘사 최언진은 단지 부장(副將)으로 임명했다. 북한 공격 시에는 소의절도사 이계훈(李繼勛)을 주장으로 하고 시위보군도지휘사 당진(黨進)을 부장으로 임용했다. 출정할 때마다 주장을 지정하는 이러한 ‘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4)『손자병법』의 「군쟁편」에는 “무릇 군대의 작전행동은 군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송태조 조광윤이 병권을 추밀원에 분담시킨 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조치였던 것이다. 군사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세밀한 부분까지 황제가 직접 관여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추밀사에게 맡겨 대리 처리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병권을 국가의 다른 기구에 이양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러한 처사는 군권이 한 곳에 밀집되어 많은 위험소지를 안고 있었다. 역사상 당말(唐末)에 추밀원은 환관(宦官)이 담당하고 그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추밀사는 조정의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재상과 권한을 나누어 행사했다. 오대(五代)시기에 추밀사는 환관에서 문관으로 교체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황제의 심복이었고 군부와 국정 대사에 두루 다 참여함으로써 재상보다 더 강력한 위치에 군림했다. 그들은 금군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병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우환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조광윤은 병권을 추밀원에 분담시켰지만 여러 면에서 추밀원을 제약하는 효과적인 조치를 취했다. 첫째,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3)1. 군사기구(軍事機構) 간 견제시스템 및 문관에 의한 군 통제 정권과 병권을 놓고 보면 평화시대에는 정권이 병권 위에 군림하고 병권을 통제한다. 그러나 비상시인 전쟁시기에는 왕왕 병권이 정권 위에 군림하고 정권을 좌우한다. 조광윤 시기는 중국통일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해야 하는 복합적인 상황에서 정권과 병권의 관계는 비정상적으로 흘러왔다. 임동(林駧)이라는 한 신하는 정권과 병권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천하에는 두 가지 권리가 있는 데 그것은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이다. 병권은 마땅히 분리하되 전횡하여서는 안 된다. 정권은 마땅히 독점하되 분리해서는 안 된다. 정권을 분리하면 모든 일의 통솔자가 없어지고, 병권을 전횡하면 필연코 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천하를 도모하는 자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임동이 말하는 정권과 병권의 관계는 평화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벌여 영토 확장을 시도하려는 시기에 알맞는 이론이다. 마침 송태조 조광윤이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었으므로, 임동의 이론을 나라와 군대를 다스리는 지침으로 삼았다. 뛰어난 지혜와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2)그러나 오대(五代)에 들어와 후당을 세운 장종이 후량을 멸한 후 각지의 번진들과 대규모의 혈전을 거치는 바람에 각지의 지방군대는 병력이 쇠퇴되어 중앙군과 대항하기 어렵게 되었고, 정국을 좌우하는 자는 중앙의 금군으로 변했고, 금군의 장군은 정권의 향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오대(五代) 이래 각 왕조의 흥망성쇠는 거의 금군 장군들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후주의 태조 곽위를 황제에 등극시키는 계획을 주도한 것도 모두 금군 장군들이었다. 진교병변에서 조광윤에게 황포(黃袍)를 입힌 것도 금군이 획책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금군이 나라의 정권을 뒤엎을 수도 있다는 점은 조광윤도 벌써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로서 금군이 없어서는 안 되며, 한 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그 나라는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군대를 황제 자신의 수중에 굳건히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오대(五代)시기 후주의 금군은 전전사, 시위친군마군사, 시위친군보군사의 3개 기구로 나뉘어졌다. 이 삼사(三司)는 각기 총사령관인 도지휘사(都指揮使)를 두고 소관(所管) 금군을 지휘했다. 황제가 출정할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1)새로운 왕조가 수립되자 그동안 밀렸던 정사며 쇄신해야 할 일 들이 산더미처럼 밀려들었다. 만일 황제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면 백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라에 치욕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조광윤은 명백히 알고 있었다. 후주의 정치기반 위에 수립된 송조(宋朝)는 오대(五代) 시기의 단명한 5개 왕조를 이은 왕조로서 그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일부 번진(藩鎭)과 신하들이 아직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고,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을 액운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송왕조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을 무렵, 전 왕조의 신하들과 개국공신들과의 갈등이 선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조광윤이 예민하게 느낀 바와 같이 이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대립이 악화되거나 격변이 일어나게 되면 그의 어머니 두태후(杜太后)가 말한 대로 ‘다시 필부(匹夫)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었다. 조광윤은 전에 후주 금군의 최고통솔자였고 또 수년간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겪어 왔다. 그는 오대(五代)시기에 끊임없이 왕조가 바뀌게 된 원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어리석고 약하기 때
제2절 황권에 큰 위협이 되는 금군(禁軍) 고위 장군 인사개편 (03)황제가 된 후 금군에 대한 인사개편을 할 때 그는 자연스레 장경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그는 전전도우후를 맡고 있던 동생 조광의를 변경윤(汴京尹)으로 이동시키고, 장경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조광윤은 조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정을 호위하는 장병들 가운데 맹호처럼 용맹한 자만해도 만 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호령할 자는 장경 밖에 없느니라.」 뼛속에 꽂힌 화살촉을 뽑았던 장경의 용감한 행동을 연상해 보면 이러한 평가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군의 인사는 유광의(劉光義)를 시위마군도지휘사에 임명한 것이다. 유광의 역시 의사십형제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본래 조광윤과 함께 후한 말기에 곽위 휘하에 있던 말단 병사였는데, 후주 세종 때 내전직압반(內殿直押班)에 배치되어 세종을 따라 회남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움으로써 금군장령으로 승진되었다. 송나라 건국 초기에 그는 이미 용첩우상(龍捷右廂)의 중급 장군이 되었다. 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중하고 명령을 잘 수행했기 때문에 조광윤의 신임을 얻었다. 송태조 조광윤이 중용한 또 하나의 중급 장군은 최언진(崔彦進)이다. 조광윤은 그를
제2절 황권에 큰 위협이 되는 금군(禁軍) 고위 장군 인사개편 (02)2. 금군 고위직을 오래 공석으로 비워둔 후, 중급 장군 중에서 임명 봉건사회에서 정권을 튼튼히 지키려면 무력에 의존해야 하고 군대를 장악한 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군대는 반드시 강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군대여야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역대 제왕들은 강력한 군대의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금군 고위장군들에 대한 인사단행을 신속하게 마무리한 송태조 조광윤은 “어떻게 하면 군대를 강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늘 승전보를 울리는 군대로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대를 정비함에 있어서 송태조는 많은 영명한 조치들을 취했다. 우선 그는 중앙군인 금군의 체제를 거의 해체하다시피 하여, 금군의 5대(五大) 고위직인 전전도점검, 전전부도점검, 시위마보군도지휘사, 시위마보군부지휘사, 시위마보군도우후 등을 장기간 공석으로 두었다. 이렇게 되자 금군의 고위장군들의 통솔권은 거의 상실된 반면, 황제는 보다 쉽게 금군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의 조치는 의도적으로 중급 장군들을 전전도지휘사, 전
제2절 황권에 큰 위협이 되는 금군(禁軍) 고위 장군 인사개편 (01)시대적으로 병권과 정권의 관계, 그리고 병권이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현실을 명확히 파악한 송태조 조광윤은 국가의 최고 군사지휘자인 전전도점검의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황제가 겸임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고, 황제가 바로 군대의 최고통솔자로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조광윤의 이러한 정치적 조치를 한마디로 비유한다면 “강을 건넌 뒤 다리를 부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부터 시작하고, 천하의 큰일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광윤은 바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쉽고 섬세한 문제를 잘 처리해 나갔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큰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1. 황제 즉위 후 신속하게 금군 고위직 인사 단행 진교병변 전에 후주 금군의 최고사령관은 전전도점검 조광윤이고, 그 다음으로 전전부도점검 모용연소, 전전도지휘사 석수신, 전전도우후 왕심기였다. 시위사 가운데서 마보군도지휘사 이중진, 마보군부지휘사 한통, 마보군도우후 한영곤이었으며, 마군도지휘사는 고회덕, 보군도지휘사는 장영탁이었다. 황제에 등극한지 1주일
제1절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노력들 (04)3. 황제 조광윤, 숲속에서 건방진 절도사들에게 결투 신청 당시에는 오대시기의 후유증이 남아있어서 막강한 병력과 재력을 갖춘 옛 후주의 일부 절도사들이 연합해 ‘절도십형제(節度十兄弟)’를 결의하고, 패권(覇權)을 다투지 않고 등극한 새 황제 조광윤의 권위에 도전해 보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뛰어난 담력과 지략을 갖춘 송태조 조광윤은 한 계책을 생각해냈다. 어느 날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절도사들을 변경(汴京)으로 불러 각각 칼과 활, 말을 준 다음, 자신도 호위병 없이 홀로 말에 올라 그들과 함께 황궁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고자문(固子門)을 지나 깊은 숲 속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10명의 절도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이 건방진 절도사들은 갑자기 황제의 초청을 받은 행차에 어리둥절해 했다. 술을 몇 잔 들이킨 다음 송태조는 태연하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니, 그대들 중에서 황제가 되고 싶은 자가 있거든 나를 죽이고 제위(帝位)에 올라도 좋다!」 이 말을 듣자 그동안 허세를 부렸던 절도사들은 조광윤의 맹호와도 같은 기개에 질려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경거망동하지 못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