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황권(皇權) 강화를 위한 ‘중앙집권제’ 확립 <11>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4)

『손자병법』의 「군쟁편」에는 “무릇 군대의 작전행동은 군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송태조 조광윤이 병권을 추밀원에 분담시킨 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조치였던 것이다. 군사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세밀한 부분까지 황제가 직접 관여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추밀사에게 맡겨 대리 처리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병권을 국가의 다른 기구에 이양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러한 처사는 군권이 한 곳에 밀집되어 많은 위험소지를 안고 있었다.

역사상 당말(唐末)에 추밀원은 환관(宦官)이 담당하고 그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추밀사는 조정의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재상과 권한을 나누어 행사했다. 오대(五代)시기에 추밀사는 환관에서 문관으로 교체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황제의 심복이었고 군부와 국정 대사에 두루 다 참여함으로써 재상보다 더 강력한 위치에 군림했다. 그들은 금군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병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우환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조광윤은 병권을 추밀원에 분담시켰지만 여러 면에서 추밀원을 제약하는 효과적인 조치를 취했다.

첫째, 추밀원에서는 병적, 무관 선발, 병력 배정과 발병부 반포 등 파병권(派兵權)만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병력을 갖고 지휘할 수 있는 전전사, 시위친군마군사, 시위친군보군사 등 3개 군사기구는 통일적으로 훈련하고 교대로 수비하며 상벌을 내리는 등 군무를 책임지게 했다. 말하자면 3개 군사기구는 단지 병력만을 가지고 있게 한 셈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크게는 2개 기구가 서로 견제하게 했다. 추밀원은 파병권이 있으나 수중에 병사가 없었고, 3개 군사기구는 병사를 소유하고 있으나 파병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병변을 일으키기가 아주 어려워지는 것이다.

둘째, 추밀사에 문관을 등용했다. 송조(宋朝) 수립 초기에 960년(태조1) 조광윤은 문관 조보를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에 임명하고, 그해 8월에는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으며, 963년(태조4) 10월에는 추밀사로 승진시켰다. 이로부터 추밀사는 문관이 맡게 되었다. 문관은 병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병변을 일으킬 가능성이 무인보다 훨씬 희박했기 때문이다.

송태조는 교묘한 수법으로 병권을 분산 및 견제시킴으로써, 나라의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병변 가능성을 미연에 뿌리 뽑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후일 여러 나라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강대한 군사력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코 병변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