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10)태조 조광윤이 실시한 또 하나의 구제방법은 ‘견면(蠲免)’이라고 하여 재해지역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중국은 예부터 충해(蟲害)를 입으면 농신(農神)에게 큰 불로 농작물의 해충을 태워달라고 기도했다. 962년(태조3)에 하북(河北), 섬서(陝西), 경동(京東) 등 여러 주에 메뚜기 떼로 인한 극심한 충해가 발생했다. 메뚜기 떼를 없애는 방법이 없던 시대에 조광윤도 농신에게 불로 메뚜기 떼를 태워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농신에게 기도하는 외에 피해지역의 세금을 면제해줌으로써 충해에 의한 어려움을 완화시켜주었다. 962년(태조3) 봄에 회남(淮南) 각지에 대규모의 기근이 발생하여 농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상황은 호부랑중(戶部郞中) 심륜(沈倫)에 의해 보고되었다. 당시 그는 오월(吳越)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변경(汴京)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주(揚州)와 사주(泗州)에서 전답이 황폐되고 농민들이 기근에 허덕이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그는 현지의 관리를 찾아가 책임을 물었다. 지방관리는 이 사실을 이미 조정에 보고했다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10)의창을 세우려는 조광윤의 구상은 실로 백성을 위한 조치였다. 사실상 의창은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여 다시 백성에게 쓰는 구제행위였다. 역대의 황제들은 흉년에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한 조치로서 의창을 설치했다. 그러나 지방관리들은 그것을 구실로 삼아 백성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낼 것을 강요했고 좋은 취지의 일은 탐관오리에 의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송태조 조광윤은 세상의 물정과 인간의 본성을 깊이 통찰하고 의창의 폐단에 대해 분석했다. 만일 흉년에 대비한 비상식량 비축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백성은 눈앞에 재해가 없는 것만 보고 내일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강요한다면 또한 지방관리들에게 이용되어 필연코 사리사욕을 꾀할 것이다. 의창의 설치는 옛날부터 잡음이 많았고 사욕에 의해 뒤틀렸기 때문이다. 과연 의창을 설치하라는 조령을 내렸더니 주현 관리들은 여전히 백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968년(태조9)에는 큰 재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이전 4년간은 날씨가 좋아 국고가 충분히 비축되었기 때문에 조광윤은 주현 관리들이 의창을 이용해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폐단을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9)4. 천재(天災)는 황제의 책임 972년(태조13) 5월에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황하에 홍수가 범람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보양(洑陽)에 위치한 황하제방이 무너졌다. 조광윤은 즉시 영주단련사(潁州團練使) 조한(曹翰)을 급파해 인부를 거느리고 제방 보수작업을 하도록 명했다. 조한이 떠나기 전에 송태조 조광윤은 진심어린 말투로 말했다. 「폭우가 계속 쏟아져 황하의 제방이 터졌다고 들었소. 짐(朕)이 이틀 밤을 머물면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는데, 천재(天災)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짐(朕)의 잘못이요. 백성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시오.」 조광윤은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절대 백성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 재난에 대해 조광윤은 우선 역사에서 늘 볼 수 있는 구제방법을 채용했다. 961년(태조2) 11월에 호주(濠州)와 초주(楚州)의 백성들이 큰 기근으로 허덕이게 되자, 그는 현지의 주 관리들에게 국고를 열어 굶고 있는 백성에게 구제금을 내줄 것을 명령해 백성들이 기근을 무사히 이겨낼 수 있게 했다. 962년(태조3) 3월에 기주(沂州)에서는 대재해가 닥쳐 쌀 한 톨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그는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8)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한 960년 8월 중원(中原)지역에 큰 가뭄이 휩쓸었다. 조광윤은 조정의 대신들을 상국사(相國寺) 등 경성(京城)의 여러 사찰로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도록 했다. 수리(水利)시설이 부족하여 생산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자랄 수 없다면 누가 해결방법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조광윤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감로수를 뿌려주시고 농토를 적셔주시기를 하늘에 빌 따름이었다. 963년(태조4) 5월에 하북(河北)의 여러 주는 가뭄이 너무 심해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걱정이 태산 같은 조광윤은 끊임없이 조정관리를 재해지역에 파견해 재해상황을 조사하게 하고 자신도 친히 상국사에 가서 기우제를 올렸다. 백성의 고통을 깊이 헤아린 조광윤은 황궁의 모든 음악연주를 금하고 식사를 푸성귀 등 거친 음식으로 바꿈으로써 황제의 경건한 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고 백성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하늘을 감화시켜 비를 뿌려 주고 백성을 적셔 주기를 기도했다. 조광윤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7)3. 풍년(豊年)들 때 흉년(凶年) 대비 역사에는 이른 바 포퓰리즘(populism)에 의해 늘 듣기 좋은 말이나 행동으로 대중의 마음에 영합하여 칭송을 받고 싶어 하는 제왕들이 있다. 그들은 남이 치켜세워주고 앞뒤로 옹위되어 떠받들리기를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공적이 있으면 자화자찬하고 성인(聖人)이라도 된 양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역사는 대개 후세 사람이 쓰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덕행이 아니다. 스스로 평범치 않다고 자화자찬하는 사이에 비석은 무너지게 되고 칭송의 말은 사라지게 된다. 송태조 조광윤은 풍년이 들면 곧 이러한 조서를 내렸다. 「풍년을 구가하는 노래는 찬양의 소리로 전파될 수 있다. “흉년에 대비하여 가능한 한 많이 비축해야 한다.”는 훈시는 역사에 기록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근래 날씨가 좋아 백성이 살만하게 되었으나, 전답에 탄식 소리가 사라진 반면 밭두렁에는 곡식 이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역사서를 깊이 탐독한 조광윤은 항상 역사를 거울삼아 풍년이 들었을 때도 백성들을 칭송하는데 열을 올리기보다는 곡식을 비축해 닥쳐올 흉년에 대비하고 식량을 낭비하지 말며 수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6)965년(태조6) 8월, 조광윤은 조령을 전국에 반포했다. 「지금부터 뽕나무나 대추나무를 많이 심거나 황무지를 개간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미납된 조세만 납부하되 영원히 점검(點檢)을 거치지 않는다.」 뽕나무와 대추나무 등은 특용작물이므로 그것은 백성들에게 곡물 외의 경제적 수입을 가져다준다. 이 나무들을 키우면 돈을 벌 수 있고 또 납세를 면할 수 있기 때문에 수입을 올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농사짓는데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짓는 백성은 원래 경작지에 대한 조세만 납부하고 개간한 땅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으며 영원히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다. 이로써 백성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더욱 열성을 보이게 하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 사실상 이 조령은 농토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의해 조세가 불합리하게 할당되어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게 되고 많은 농토가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놓은 보완책이었던 것이다. 965년(태조6) 9월에 그는 또 하나의 조령을 내렸다. 「오대(五代) 이래 전란이 계속 일어나면서 나라재정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5)사실상 농민들은 전쟁, 기후, 풍토, 자연재해, 관리들의 학정(虐政) 등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타향살이를 하거나 여기저기 이동하게 된다. 문제를 세심하게 처리하는 조광윤은 언제나 백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그러므로 유민(流民)문제에 대해 그는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고 특별히 지방에 조령을 내렸다. 「타향으로 떠난 유민이 있으면 해당 주현(州縣)에서 호적을 점검하고, 그들이 내야 할 세금을 친지들에게 대신 부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조광윤은 이와 같이 백성의 일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고려했다. 유민들을 정착시켰다 하더라도 여러 사정으로 다시 타향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방비하고 조치를 취하는 것은 조광윤의 일관된 일처리의 특징이었다. 967년(태조8) 7월에 그는 또 하나의 조서를 내렸다. 「이번 여름과 가을 이래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액운이 돌고 있는데 백성들이 타향으로 떠날까봐 깊이 염려된다. 각 주 장관에게 지령을 내리노니 백성들에게 고하여 정착지를 떠나지 말도록 하며 이재민에게는 과세를 면제해 주겠노라.」 중국은 땅이 넓은 탓에 그해 여름과 가을에 어떤 곳은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4) 2. 유랑민(流浪民)의 귀향을 위해 농지개간 허용 천하통일을 어느 정도 이룬 후 조광윤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방황하고 있는 유랑 농민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여러 가지 적극적인 조치들을 취해 객지에서 방황하는 농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줌으로써 정국을 안정시켰다. 유랑민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조광윤은 흉년에 군대를 징모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흉년에 생활고에 쪼들리는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나라에서 유랑민들을 대거 군대에 징모하여 코앞에 닥친 그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해주고, 굶주림 때문에 조정에 반항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야 천하가 태산처럼 끄떡하지 않고 전란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조광윤은 유랑민들이 안정적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게 했다. 또 혹시 그들이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할까봐 염려하여 행정수단을 통해 나라의 재배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는 하급 관리들에게 책임제를 실시해 그들의 관할구역에서 백성들이 생산임무를 수행하도록 철저히 감독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농사를 감독하는 ‘과민(淉民)계획’이다. 961년(태조2) 그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내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3)그는 토지측량 과정에서 법규를 위반하거나 백성에게 해를 끼친 관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징벌한다고 했다. 모든 사물은 절대적이지 않듯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동물인 인간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변이 생기게 마련이다. 비록 조정에서 토지측량관을 파견할 때 인선에 진지한 검증을 거쳤지만, 막상 이권에 부딪쳤을 때 측량과정에서 규범을 어기는 사람이 생겨났다. 상하(商河) 현령 이요(李瑤)는 평소 ‘토황제(土皇帝)’ 행세를 하며, 전답은 많은데 비해 세금은 늘 적게 냈다.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해 농토를 측량하자 그는 암암리에 방해작전을 펼쳤다. 일부 호족(豪族)들은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 이요에게 뇌물을 주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조정에서 상하현에 파견한 토지측량관 신문위(申文緯)는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로 벼슬은 높았지만 무책임한 자였다. 그는 토지측량과정에서 어려운 문제는 방치하고 쉬운 것만 골라 처리했다. 그리고 현령 이요의 소행에 대해서는 못 본 척했으며, 상하의 측량상황을 허위로 보고했다. 그 결과 이요와 신문위는 백성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조광윤은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래
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2) 1. 실경작자(實耕作者)를 위해 대규모 측량사업 실시 오대(五代)시기에는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는 바람에 농사는 부진하고 농지는 황폐되었으며 수리(水理)공사를 보수하지 못해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조광윤은 천하를 얻은 후 속히 사회를 안정시키고 나라경제를 발전시키려 했다. 그는 당덕종(唐德宗) 초기에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실시했던 ‘양세법(兩稅法)’을 농토의 부과세제도로 책정했다. 이는 백성의 생존을 위한 너그러운 조치였다. 양세법은 단지 토지세와 주민세만 포함되었고, 징세원칙은 자산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전답면적과 성인이나 부녀, 미성년자를 구분하지 않고 인구수에 의해 세금을 징수했다. 그러므로 정확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나라는 숨기거나 누락된 농토를 명확히 조사해기 위해 토지에 대한 대규모 측량사업을 실시해야만 했다. 후주 세종은 대대적으로 농토를 측량해 황하(黃河) 이남의 60개 주의 전답에 대한 조세를 균등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역대로 특별우대를 받아 조세를 면제받았던 곡부(曲阜)의 공자(孔子) 후손들도 특권이 취소되어 일반 평민과 똑같이 규정에 따라 납세하게 되었다. 세종은 농토측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