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한 960년 8월 중원(中原)지역에 큰 가뭄이 휩쓸었다. 조광윤은 조정의 대신들을 상국사(相國寺) 등 경성(京城)의 여러 사찰로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도록 했다.
수리(水利)시설이 부족하여 생산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자랄 수 없다면 누가 해결방법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조광윤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감로수를 뿌려주시고 농토를 적셔주시기를 하늘에 빌 따름이었다.
963년(태조4) 5월에 하북(河北)의 여러 주는 가뭄이 너무 심해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걱정이 태산 같은 조광윤은 끊임없이 조정관리를 재해지역에 파견해 재해상황을 조사하게 하고 자신도 친히 상국사에 가서 기우제를 올렸다. 백성의 고통을 깊이 헤아린 조광윤은 황궁의 모든 음악연주를 금하고 식사를 푸성귀 등 거친 음식으로 바꿈으로써 황제의 경건한 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고 백성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하늘을 감화시켜 비를 뿌려 주고 백성을 적셔 주기를 기도했다. 조광윤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풍년이 들었을 때도 그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재해가 들었을 때의 대비책이었다.
이러한 ‘민본의식(民本意識)’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백성을 염두에 두었고, 물질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 때문에 비관하지 않는<不以物喜, 不以己悲> 태도를 유지했다.
풍년에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 것은 황제와 신하들이 서로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 해에 새로운 성과를 기대하는 일종의 정치활동인 것이다. 풍년축하회도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폐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공적과 은덕을 칭송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늘 칭송하는 중국인의 습관을 고쳐 풍년이 들 때면 널리 비축할 것을 권장했고, 흉년이 들 때면 솔선수범해 궁중의 비용을 절감하고 간절히 백성의 재난을 없애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전대의 제왕들이나 후세의 제왕들에게서 다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