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재(天災)는 황제의 책임
972년(태조13) 5월에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황하에 홍수가 범람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보양(洑陽)에 위치한 황하제방이 무너졌다. 조광윤은 즉시 영주단련사(潁州團練使) 조한(曹翰)을 급파해 인부를 거느리고 제방 보수작업을 하도록 명했다.
조한이 떠나기 전에 송태조 조광윤은 진심어린 말투로 말했다.
「폭우가 계속 쏟아져 황하의 제방이 터졌다고 들었소. 짐(朕)이 이틀 밤을 머물면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는데, 천재(天災)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짐(朕)의 잘못이요. 백성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시오.」
조광윤은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절대 백성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
재난에 대해 조광윤은 우선 역사에서 늘 볼 수 있는 구제방법을 채용했다.
961년(태조2) 11월에 호주(濠州)와 초주(楚州)의 백성들이 큰 기근으로 허덕이게 되자, 그는 현지의 주 관리들에게 국고를 열어 굶고 있는 백성에게 구제금을 내줄 것을 명령해 백성들이 기근을 무사히 이겨낼 수 있게 했다.
962년(태조3) 3월에 기주(沂州)에서는 대재해가 닥쳐 쌀 한 톨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그는 특별히 기주 백성들에게 종자, 식량을 하사하고 숙주(宿州)의 관리들이 기주에 가서 이재민들의 기근을 해결해 주도록 조령을 내렸다.
연말에는 또 포주(蒲州), 진주(晋州), 자주(慈州), 습주(隰州), 상주(相州), 위주(衛州) 등 6개 주(州)에서 더 큰 규모의 구제금을 마련하여 기주의 이재민들을 구휼하라고 조령을 내렸다.
송태조 조광윤은 자연재해를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채택했다. 각지에 의창(義倉)을 세운 것은 바로 흉년을 대비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
963년(태조4) 3월에 그는 각지에 의창을 세울 것을 명했다.
「후주시절에 부패관리들이 악용하는 바람에 의창이 폐지됐었는데, 작은 재해를 입어도 대처해 나갈 방도가 없다. 각 주에서 소속 현에 의창을 다시 설치하고, 현재 황궁에서 징수하는 양세(兩稅)에서 1석당 1말씩 비축해 흉년에 백성의 구제용으로 쓰도록 하라.」
송나라 초기에 재해가 자주 발생해 나라는 세금면제와 식량보조 등 구제금을 많이 방출했기 때문에 조광윤은 다시금 심각한 재해가 닥쳤을 때 국가가 백성을 구제할 힘이 있겠느냐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의창을 다시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의창은 농민의 세금을 가중시키는 방법으로 의창의 식량을 비축했던 후주와는 달리, 황궁에서 쓸 식량에서 10분의 1을 떼어 의창에 식량을 비축하기로 했다. 이것은 황궁의 경비를 줄임으로써 백성에게 세금부담을 안기지 않으면서 의창에 식량을 비축할 수 있어 흉년에 이재민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말하자면 일찍이 황제 스스로가 백성들을 위해 조정에 납부할 세금에서 미리 ‘십일조(十一租)’를 떼었던 셈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참으로 감동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이미 1천년 전 봉건전제시대에 정책으로 실현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