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송태조 조광윤은 지방관리들이 조정대신들에게 아부하고 뇌물을 공여하는 사실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조령을 내렸다. 「조정관원들이 각 주현에 출장 갔을 때, 지방관리들로부터 사적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한 자는 그 죄를 물을 것이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은 바로 ‘흠차(欽差)관원’이다. ‘흠차’란 황제를 대신하여 파견한 주요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지방관리들은 주요 추진사업을 시찰하거나 출장 온 조정의 관리들에 대해 아부했다. 지방관리들은 조정에서 온 관리들의 권한을 이용해 사욕을 달성하려 했고, 파견된 중앙 관리들은 또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권한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왕조들에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광윤은 이에 대해 특별히 경고를 한 것이었다. 한 예를 들어보면, 공비고사(供備庫使) 이수신(李守信)은 황제의 명을 받고 진(秦), 롱(隴)이란 지역에서 목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직권을 이용해 관청의 적지 않은 돈을 돌려썼다. 그는 또 목재를 뗏목으로 만들어 우습유(右拾遺)란 관직에 있던 그의 사위 마적(馬適)에게 주었다가 부하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이와 같이 송태조시기의 어사대는 항상 사건처리에 관여했고 불순한 짓을 한 당사자들을 엄격히 처벌했다. 어느 때인가 조광윤은 품계를 가진 관리들의 자제를 등용하기 위한 고시를 시행했는데, 고부원외랑(庫部員外郞) 왕이손(王貽孫)과 주역박사(周易博士) 해서(奚嶼)가 고시장을 주관하도록 했다.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도곡(陶谷)은 그의 아들 도전(陶戩)을 합격시키기 위해 해서에게 뇌물을 주고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해서(奚嶼)는 법을 어기고 실력이 없는 도전을 합격시켰다. 그 결과 누군가에 의해 고발되었고, 이 일을 알게 된 조광윤은 어사대에 지시하여 엄중히 조사하도록 했다. 한 달 여 간의 조사를 거쳐 어사대는 고발한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조광윤은 해서를 건주사호참군(乾州司戶參軍)으로 좌천시켰다. 고시장을 주관했던 고부원외랑 왕이손은 비록 사정을 모르고 있었으나 책임자로서의 관리책임을 물어 찬선대부(贊善大夫)로 강직시켰다. 한림학사승지는 한직이었기 때문에 도곡에게는 엄한 처분을 내리지 않고 뇌물을 주고 청탁한 죄로 두 달분 봉급을 깎는 감봉처분을 내렸다. 인간의 불완전성에 의해 탐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5. 감찰기구를 설치, 위법한 관리 엄벌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송태조 조광윤은 관리들이 백성에게 해로운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감찰기구를 설치하고 그 기능을 강화했다. 송나라가 설립한 감찰기구는 당나라제도를 답습했다. 조정에 어사대(御史臺)를 설치하고, 그 밑에 또 대원(臺院), 전원(殿元), 찰원(察院)을 설치했다. 어사대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 어사중승(御史中丞)을 두었다. 어사대의 직무는 “관리들의 부정과 국가의 법과 기강을 엄숙히 다스리며, 큰 사안은 조정에 회부해 의논하고 작은 사안은 직접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로는 재상에서 아래로는 일반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찰기구의 탄핵대상이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송태조시기에 감찰기구는 그 직분을 충분히 발휘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또한 관리들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불법행위를 못하도록 하기 위해 집정대신의 옛 친구, 측근 등을 어사대의 감찰관리에 임용하는 것을 단호히 배제했다. 어사대는 관리의 비리를 조사하고 사회질서와 국가기강을 엄정히 다스리는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기구이며, 모든 관리가 감찰, 탄핵의 대상이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962년(태조3) 8월에 지제고(知制誥) 고석(高錫)이 송태조 조광윤에게 제의했다. 「법관을 임용할 때는 법률 10개 조항에 대한 고시를 치러야 합니다.」 법률지식이 없는 자에게는 사법직책을 맡길 수 없도록 하자는 건의를 조광윤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과거시험에 『송형법』을 추가해 시제(試題)로 출제했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는 자는 형법과 함께 두 가지 소경(小經) 소경(小經): 『편칙(編敕)』 등 여러 법규을 함께 공부하게 했으며, 선발된 자는 대리평사(大理評事)나 형사검법관(刑事檢法官)에 임명했고 진급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까지 오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형법고시(刑法考試)’ 제도의 설립은 사법관에 뜻을 둔 지식인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법전이 문인들 가운데 널리 보급되게 했다. 이것은 모두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일들이었다. 이밖에 지방관리들이 형사안건을 판결하는데 대해 관심을 두고 백성에게 억울한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곤 했다. 그러므로 사법관인 어사(御史)와 대리(大理)를 뽑는 인사문제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특별히 신중하게 처리했다. 조광윤은 전중시어사(殿中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969년(태조10) 4월에 사천(四川)지역에 법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문제와 관련해 한 관리가 조광윤에게 상소를 올렸다. 「사천지역을 평정한 후 조정에서는 『형법』과 『신편칙』을 각 주에 반포하고, 962년(태조3) 3월 정묘조서(丁卯詔書) 정묘조서(丁卯詔書): 사형으로 판정한 사건은 형부에 회부하여 재심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조령(詔令) 와 기타 조례(條例)도 함께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각 주 관리들이 직무에 태만하고 법을 잘 준수하지 않으며, 중죄로 판결한 것을 고소장 하나만 만들어 계절 말에 가서야 상부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고소장에는 다만 “어떤 일로 참수한다거나 추방한다.”는 요지만 들어있고 죄목이나 적용한 형법조항은 기록하지 않으며, 범인들도 주범과 종범을 구분하지 않고 악한 자가 아님에도 참수형에 처한 사람도 있습니다. 전란이 일어난 이래 강포(强暴)한 자들을 아직 다 제거하지 못한 상황이오니 임시조치를 취해 양심을 저버린 관리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해야 할 것입니다. 사천 등 각 주에 엄한 칙령(勅令)을 내려 법을 잘 준수하도록 하되,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엄히 탄핵해야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4. 법률 제정과 법전 집행은 문관이 담당 송태조 조광윤은 『송형법(宋刑法)』을 수정해 백성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는 조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강령(綱領)은 치밀하고 소통해야 하며, 문맥은 정묘하고 명백해야 한다.」 이 수정원칙에 따라 한림학사 두의(竇儀) 등은 1년이 안 돼 『송형법』을 수정하고 『신편칙(新編敕)』을 편찬했다. 이 법전은 먼저 법률조항과 법률소(法律疏)를 열거하고, 그 다음으로 칙(敕), 령(令), 격(格), 식(式)은 전에 법률조문에는 없었던 것으로 독창적인 법전을 만들어냈다. 당시 법전을 수정하기 위해 사람을 물색할 때 조광윤은 재상 범질(范質)과 상의했다. 범질은 두의를 추천했다. 후진의 진사였던 두의는 학문이 깊고 청렴하고 신중하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으며 법전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단명전(端明殿) 학사(學士)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광윤은 특별히 한림원 학사로 돌아올 것을 명하고, 범질에게 자신의 뜻을 잘 전해줄 것을 명했다. 한림학사로 부임한 두의는 법전을 수정하라는 명을 받자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법전을 편찬하는 목적은 온 세상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어느 날 여러 사람과 사법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도 오대(五代)시기의 악습을 질타하며 통탄해 마지않았다. 「오대(五代)시기의 제후들은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고 법을 왜곡해 함부로 사람을 죽였지만 조정은 모른 체 했소. 형부(刑部)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고 귀중한 인명을 해치는 번진들에게 관용을 베푼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이오?」 후진(後晋)시기에 36명의 관리를 전국 각지에 파견해 조세를 거두게 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이들에게 보검(寶劍)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의미였다. 세금징수 관리들은 무장한 많은 병졸들을 이끌고 가서 조세를 거둔다는 핑계로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보검을 휘둘러서 죽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같이 오대시기에 많은 백성들이 군인들에게 살해되었지만 조정대신들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당의 추밀사 곽숭도(郭崇韜)는 일찍이 장종 이존욱과 획책하여 후량을 멸망시켰고, 후에는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을 도와 전촉(前蜀)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곽숭도는 한 환관
리투아니아에서의 해프닝한세상 살아가노라면 일도 많고 탈도 많다. 사람마다 근기와 경험과 형편이 다르니 대처방법도 다르다. 지난 연말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반도 여행 중 뜻밖에 관광버스가 고장나는 바람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 유럽사람들이 놀랄만한 참을성을 가지고 “아름다운 기다림을 통해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지혜로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사람들이라면 이때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유럽은 대개 가톨릭나라여서 12월초부터 온 시가지는 “크리스마스-트리, 마켓, 파티와 페스티벌”로 축제분위기가 한달 이상 계속된다. 크리스마스기간에는 강의도 없어 방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뭣해 나는 “이한치한(以寒治寒)”으로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엄동설한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북유럽의 발틱(Baltic) 3국 리투아니아(Lithuania), 라트비아(Latvia), 에스토니아(Estonia)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핀란드(Finland)를 여행했다. 나는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를 떠나 발틱 3국의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핀란드 헬싱키까지 장장 왕복 3,300여km를 6박 8일(버스에서 2박) 동안 버스로 설국여행(雪國旅行)을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3. 3개 사법기구(司法機構) 간 상호견제시스템 봉건전제사회에서의 법제는 제왕(帝王)이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는 국가기구를 통해 수립하는 법률제도이다. 법률의 제정, 집행, 준수는 통치자가 독재를 실행하는 방법이며 수단이었다. 송나라는 건국 초기에 자체 법전이 없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당율(唐律)』과 후주의 『대주형통(大周刑統)』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비록 법률은 있었으나, 사법관은 법망의 틈새를 이용해 마음대로 사형을 선고하거나 직무에 태만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했다. 이리하여 법제를 운용하기 위한 적임자를 임용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관리가 법제관념이 확고하지 않으면 법을 잘 집행할리 만무하다. 송태조 조광윤이 아무리 수시로 조령을 반포한다 해도 근본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일련의 체계적인 법제도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며 법체제에 대한 일대 개혁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광윤은 오대(五代)시기에 법을 모르는 무장들이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하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마음대로 사형을 선고하고 인명을 소홀히 다루는 잘못
제6절 엄정한 사법제도 확립: 국가백년대계의 지름길2. 사형은 신중하게: 친아들 죽인 마종기(馬從記) 조광윤이 황제에 등극한 이듬해의 일이다. 금주(金州) 안강군(安康郡)에 마종기(馬從記)라는 사람이 아내가 일찍 죽자 아들 마한혜(馬漢惠)와 살고 있었다. 후에 마종기는 한 과부와 재혼했는데, 데리고 온 아들이 있어 이름을 마재종(馬再從)이라 지어주었다. 마종기의 친아들 마한혜는 장성한 후 제멋대로 날뛰면서 나쁜 짓들을 골라하고 다녔다. 이를 보다 못한 계모의 아들 마재종이 여러 번 타이르자 마한혜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이에 격노한 마종기는 일가족과 상의한 후 후처와 함께 친아들 마한혜를 죽였다. 대의를 위해 친자식을 죽인 마종기는 봉건사회에서는 절의(節義)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마을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지만, 그것은 분명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였다. 법률로 놓고 볼 때 마종기는 살인죄를 범했고 법에 따라 응당 참수형을 당해야 했다. 금주방어사 구초(仇超)와 판관 좌부(左扶)는 마종기와 일가족을 체포하여 살인죄로 모두 참수했다. 금주에서는 마종기사건에 대해 논쟁이 분분했다. 이 소문은 조정으로 퍼졌고 송태조 조광윤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