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러 사람과 사법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도 오대(五代)시기의 악습을 질타하며 통탄해 마지않았다.
「오대(五代)시기의 제후들은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고 법을 왜곡해 함부로 사람을 죽였지만 조정은 모른 체 했소. 형부(刑部)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고 귀중한 인명을 해치는 번진들에게 관용을 베푼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이오?」
후진(後晋)시기에 36명의 관리를 전국 각지에 파견해 조세를 거두게 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이들에게 보검(寶劍)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의미였다. 세금징수 관리들은 무장한 많은 병졸들을 이끌고 가서 조세를 거둔다는 핑계로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보검을 휘둘러서 죽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같이 오대시기에 많은 백성들이 군인들에게 살해되었지만 조정대신들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당의 추밀사 곽숭도(郭崇韜)는 일찍이 장종 이존욱과 획책하여 후량을 멸망시켰고, 후에는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을 도와 전촉(前蜀)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곽숭도는 한 환관의 미움을 사게 되면서 황후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황후는 위왕 이계급에게 곽숭도를 죽여 달라고 요청했고, 이계급은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궁에 도착한 곽숭도가 층계에 오르는 순간 그의 수하가 철퇴를 휘둘러 머리통을 박살냈다. 한 대장군을 죽이는 것이 양 한 마리 잡는 것처럼 간단했다.
963년(태조4), 조광윤은 사형의 최종심사권을 형부(刑部)에 맡기고 각 주에 명을 내려 사형으로 판정한 사건은 모두 형부에 넘겨 재심사를 거치도록 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항상 부족한 점이 따르기 마련이다. 조광윤이 사법기구의 업무분장을 명확히 했으나 사건처리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발생했다.
대리사(大理寺)와 형부(刑部) 간에 사법사무 처리과정에서 분규가 생겼다. 대리사경(大理寺卿) 이부(李符)와 형부상서(刑部尙書) 장심(張伈)은 직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 반목했다.
대리사경 이부가 심사해 판결한 사건이 형부상서 장심에게 와서는 대부분 부적합 취급을 받고 재심리에 들어갔고, 이러한 두 사람간의 알력으로 사건처리가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사건처리에서 대리사의 역할 비중이 너무 큰 데서 기인된 문제라고 판단한 조광윤은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각 주에서 회부하는 사건들은 대리사와 형부에서 공동으로 심사, 판정한다. 각 주의 순찰관(巡察官)들은 도적을 체포했을 경우, 먼저 심문하지 말고 소속된 주 관청에서 압송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두 기구가 사건을 공동으로 처리하게 함으로써, 형부의 권한을 한층 더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