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이간책(離間策)은 소인배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남당통치자는 일부 주권을 포기하고 송나라에 귀속되어 왔다. 그러나 남당에도 앉아서 멸망하기만을 기다리려 하지 않는 신하들이 있었다. 중국을 통일하려는 조광윤에게 있어서 그들은 장애물이었다. 역사는 늘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970년(태조11) 남당 남도유수(南都留守) 임인조(林仁肇)가 이욱에게 건의했다. 「회남을 지키고 있는 송나라의 수비군은 많지 않습니다. 송나라는 이미 후촉을 멸망시켰고, 지금은 또 영남(嶺南)을 평정하기 위해 대군을 출동시켰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병사들이 지쳐있을 테니 지금이 공격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저에게 병마 수만을 주신다면, 수춘경(壽春經)에서 도강해 강북의 옛 지역들을 수복할 것입니다. 만일 송군이 토벌하러 온다면, 회남을 방어하면서 승부를 겨룰 것입니다.」 그는 이욱이 윤허하지 않을까봐 특별히 서약서를 제출했다. 「성공하면 이익은 나라의 것이고, 실패하면 멸족을 감수하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것을 폐하께 맹세하옵니다.」 남당의 뜻있는 신하인 임인조에게 반
폴란드 크라쿠프 소재 야기엘로니아대학의 유일한 한국인교수이며, 인터넷종합일간지 <시사1> 논설위원 조병세박사가 최근 소용돌이치고 있는 북한정세와 관련, 지난 3월 10일 연구실에서 트르밤텔레비전(Trwam TV)과 인터뷰를 가졌다. 폴란드는 오래 전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나라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휴전협정을 맺을 때, 당시 공산국 폴란드는 유엔중립국감독위원회(NNSC)의 4개 회원국(스위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중 하나로, 지금까지 계속 매 분기마다 한번씩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또한, 폴란드는 강한 나라들 사이에 끼어있는 점이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매우 흡사하여, 어느 나라보다도 남북한정세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2013년 10월, 폴란드의 코모로프스키(Komorowski) 대통령이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흔치 않은 “국방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양국관계를 “전략적 동반자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http://tv-trwam.pl/film/informacje-dnia-10032016(20분 중 16분부터 3분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위엄과 온정을 동시에 보이니 허(虛)와 실(實)을 추측할 수 없다 고금의 전례를 놓고 볼 때 훌륭한 군사가들은 주적과 싸울 때 먼저 기타 경거망동의 위험이 있는 적수들에 대해 왕왕 ‘헛총질’을 한다든가 ‘허장성세(虛張聲勢)’로써 위협을 주고 그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이는 주요 군사행동이 불의의 방해를 받아 불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수조치였다. 조광윤은 남당정권과 대응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다. 조광윤은 즉위 초기에 회남에서 이중진의 반란을 평정한 후, 전투함대의 작전훈련을 개시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이를 본 남당은 송나라가 곧 남당을 공격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사실 이는 조광윤이 남당을 겁주기 위한 헛총질이었다. 남당이 경거망동해서는 안되며 그렇지 않을 때는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남당을 때려 부수겠다는 경고메시지였다. 이런 공갈은 확실한 효과를 가져왔다. 남당은 변함없이 송조(宋朝)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배신할 엄두를 못 냈다. 조광윤은 뒷걱정 없이 후촉, 남한 등 다른 할거정권들을 평정할 수 있었고 통일의 국면을 거침없이 타개해 나갔다. 한편, 남당정권이 딴 마음을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5. 남당(南唐) 평정 군사나 정치에 있어서 크게 위협적일 경우 응당 문제의 사안을 중요시하여 집중적으로 주된 적을 공격해야 하지만,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적수에 대해서는 가만히 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없애버려야 손쉬운 법이다. 남당에 대한 조광윤의 태도가 바로 이러했다. 960년 1월에 등극해 970년(태조11) 초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조광윤은 비록 북한 정벌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형남과 호남을 일거에 지혜롭게 탈취하고, 이어서 물산이 풍요한 후촉과 남한을 강점하고 거란과 호각지세(互角之勢)로 대항함으로써, 오대(五代) 이래 군사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직 북쪽에 작은 땅 북한과 남쪽에 약한 정권 남당이 남아있지만 통일대업은 거의 다 이루어진 셈이었다. 남당왕 이욱(李煜)은 본래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재다능한 그는 왕이라기보다는 문학, 서예, 미술, 음률에 뛰어난 천재적 예술가로서 그 재능은 아버지 이경(李璟)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961년(태조2)에 이경이 죽은 후 마음의 준비도 없었던 그는 25세에 떠밀려서 정치무대에 오르게 되고 운명적으로 남당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970년(태조11) 9월, 조광윤은 남당왕 이욱에게 명하여 남한왕 유창에게 사신을 보내 번진왕(藩鎭王)으로 봉할 것이니 송나라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도록 했다. 유창은 이욱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사신을 억류하고 동시에 송나라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조광윤이 중국통일의 계획을 북방에서 다시 남방으로 돌렸고 남한이 그의 첫 번째 정복대상으로 되어 있던 차에 항복권유가 거절당하자, 그는 반미를 주장(主將)으로, 낭주(朗州)단련사 윤숭가(尹崇珂)를 부장(副將)으로, 또 도주자사(道州刺史) 왕계훈(王繼勛)을 도감으로 내세워 남한을 전면 공격해 탈취하도록 명했다. 이때 부패한 남한정권은 일찍이 중종(中宗) 유성(劉晟) 시기부터 군의 정비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병력이 쇠약했다. 송군이 대거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안팎은 온통 공포에 떨었다. 조정에는 장병을 통솔할 장수가 없었고 남한왕 유창도 군사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할 수 없이 공징추(龔澄樞)에게 명하여 하주(賀州)를 지키도록 했다. 공징추가 병사를 이끌고 하주를 향해 절반 쯤 나아갔을 때 송군이 이미 방림(芳林)에 진입했고 그 곳은 하주에서 30리 밖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4. 남한(南漢) 평정 북한정벌에서 소득 없이 돌아온 후 조광윤은 이전의 ‘선남후북(先南後北)’의 통일전략을 계속해 추진하기로 했다. 그는 설화광(薛化光)의 건의를 받아들여 곽진(郭進)에게 서산(西山)을 통제토록 하고, 무수기(武守其)는 진주(晋州)를 지키고, 이겸부(李謙溥)는 습주(隰州)를, 이계훈(李繼勛)은 여전히 소의(昭義)를 지키도록 명하여 군사적으로 북한과 거란을 철저히 방비하도록 했다. 1년 남짓한 동안의 휴전과 정비를 거쳐 조광윤은 중국통일의 위업을 재개했다. 970년(태조11) 9월, 남한에 대해 다방면으로 조사와 분석을 끝내고, 남한부터 평정하는 방침을 세웠다. 남한왕 유창이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에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했다. 남한의 내상시(內常侍) 소정현(邵廷琄) 소정현(邵廷琄): ‘소정(邵廷)’이라고 쓰인 기록도 있다. 은 평소에 조광윤의 명성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조광윤이 이균과 이중진의 반란을 평정한 후 송나라가 반드시 영토 확장의 속도를 늘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과연 963년(태조4)에 송나라는 길을 빌린다는 명분하에 형남과 호남을 평정함으로써, 남한이 인접국이 되었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963년(태조4) 9월 10일, 곽무위를 의심하게 된 북한왕 유계은은 궁중에서 연회를 열고 대신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그를 참살하려 했다. 이 낌새를 알아차린 곽무위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송나라 간첩 후패영도 유계은이 곽무위를 죽이려한다는 것을 알고 자객 10여 명을 이끌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북한왕 유계은이 침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을 때 후패영이 쳐들어가서 죽였다. 이 사건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던 곽무위도 후패영을 따라 궁에 들어갔다. 후패영이 거사를 끝내고 미처 나올 새도 없이 그가 보낸 자객들이 창문으로 뛰어들어 후패영을 비롯한 10여명을 모두 사살했다. 곽무위는 후패영을 죽여 입을 막고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유계은이 피살되자 북한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계은의 동생 유계원(劉繼元)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입궁해 혼란국면을 안정시켰다. 이때 송의 대군이 북한 경내에 진입했다. 이리하여 유계원은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화급히 사신을 거란에 보내 지원병을 요청하고 시위도우후(侍衛都虞侯) 유계업(劉繼業)에게 단백곡(團柏谷)을 지키도록 명했다. 후패영이 북한왕 유계은을 죽인 일은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3. 북한(北漢) 공격 용병술이란 병법에서 말하는 ‘계책(計策)’이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계책을 꾸미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로 되고, 군자의 체통을 지키다가도 소인배의 작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남당을 평정하고 북한을 와해시키는 과정에서 조광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계책지법을 적용했다. 큰 방향만 정확하다면 군자도 ‘소인지책(小人之策)’인 이간전(離間戰)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조광윤은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에 따라 처음에는 비좁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정복하지 않으려고 했다. 북한을 방패로 이용해 거란과의 충돌을 막고 사방을 평정하기 전에 북쪽 국경에서 일어나는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음 놓고 남쪽을 먼저 정벌하려면 북한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헛총질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국경의 첩자를 통해 북한왕 유균에게 이런 말을 전한 적이 있다. 「군주가문과 조씨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지간이고 서로 굴복하지 않았소. 오늘 나와 당신은 서로 지은 원한이 없는데 왜 우리를 괴롭히는 거요. 만일 중원을 차지할 뜻이 있다면 태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한편, 송나라 북로군은 후촉으로 들어가는 잔도(棧道)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전진할 수가 없었다. 왕전빈은 장수 강연택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군을 이끌고 나천로(羅川路)를 통해 진군하면서, 한편으로는 잔도를 보수하도록 했다. 며칠이 안되어 잔도가 복구되자 북로군과 동로군은 심도(深渡)에서 합류했다. 강을 의지해 진을 치고 있는 후촉군을 송군은 세 갈래로 공격해 교량을 탈취했다. 후촉의 주장 왕소원은 교량을 다시 빼앗기 위해 정예부대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역시 격퇴 당했다. 송군은 승승장구하여 대만(大漫), 천새(天塞) 등 후촉군의 거점을 공략하고 의주자사(義州刺史) 왕심초(王審超)를 생포했다. 후촉군 주장 왕소원은 병사를 이끌고 몇 번 공격해왔지만 모두 실패하고 하는 수 없이 검문(劍門)으로 철퇴했다. 북로군 주장 왕전빈은 장병을 이끌고 이주(利州)로 진입해 군량 80만석을 노획했다. 병법을 깊이 연찬한 송나라 장수들은 조광윤이 정해준 용병책략을 준수하고 또 현지 실정에 따라 기민한 전략을 펼쳤기 때문에 이주에 진입했을 때 이미 적의 군량 150만석을 노획했다. 타지에서 작전을 하고 먼 길을 달려온 송군에게 있어서 군량을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이번 전쟁에서 방어를 하게 된 후촉도 송군의 동향을 살핀 후 곧 닥치게 될 치열한 전쟁에서 필승을 다짐하는 군신들의 열의가 하늘을 찔렀다. 맹창은 송군이 북쪽에서 남하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소원을 주장으로, 조숭도(趙崇韜)를 도감(都監)으로, 한보정(韓保正)을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적극 저항하도록 했다. 재상 이호가 베푼 전송연회에서 후촉의 주장인 왕소원은 상당히 가벼운 어조로 장담했다. 「이번 출정이 어찌 송군을 물리치는 것으로만 끝나겠습니까? 나는 3만 명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군사를 이끌고 중원을 가볍게 쓸어버릴 것이오!」 964년(태조5) 12월 19일, 봉주(鳳州)에서 후촉으로 진군한 송나라의 북로군은 건거도(乾渠渡), 만인(萬仞), 연자채(燕子寨) 등 후촉군 거점을 공략하고 군량 40여만 석을 노획했다. 후촉의 흥주자사(興州刺史) 남사관(藍思綰)이 서현(西縣)으로 후퇴했고, 송군은 전쟁을 개시하자마자 승전보를 전했다. 흥주(興州)가 송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촉의 초토사 한보정은 산남(山南)을 포기하고 서현으로 후퇴했다. 사연덕은 송군의 선두부대를 이끌고 서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