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12)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970년(태조11) 9월, 조광윤은 남당왕 이욱에게 명하여 남한왕 유창에게 사신을 보내 번진왕(藩鎭王)으로 봉할 것이니 송나라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도록 했다.

유창은 이욱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사신을 억류하고 동시에 송나라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조광윤이 중국통일의 계획을 북방에서 다시 남방으로 돌렸고 남한이 그의 첫 번째 정복대상으로 되어 있던 차에 항복권유가 거절당하자, 그는 반미를 주장(主將)으로, 낭주(朗州)단련사 윤숭가(尹崇珂)를 부장(副將)으로, 또 도주자사(道州刺史) 왕계훈(王繼勛)을 도감으로 내세워 남한을 전면 공격해 탈취하도록 명했다.

이때 부패한 남한정권은 일찍이 중종(中宗) 유성(劉晟) 시기부터 군의 정비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병력이 쇠약했다. 송군이 대거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안팎은 온통 공포에 떨었다.

조정에는 장병을 통솔할 장수가 없었고 남한왕 유창도 군사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할 수 없이 공징추(龔澄樞)에게 명하여 하주(賀州)를 지키도록 했다.

공징추가 병사를 이끌고 하주를 향해 절반 쯤 나아갔을 때 송군이 이미 방림(芳林)에 진입했고 그 곳은 하주에서 30리 밖에 떨어져있지 않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한 공징추는 황급히 병사를 끌고 도망쳐 돌아오고 말았다. 남한의 환관 오언유(伍彦柔)는 수군을 거느리고 하주를 응원하러 가다가 서쪽 강변에 매복해 있던 송군에게 포위되었다.

송군은 오언유를 생포하여 참수하고 그 머리를 내다 걸어 대중에게 보였다. 하주를 지키고 있던 남한군은 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송군의 위력에 눌린 그들은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970년(태조11) 11월, 송군은 하주에 이어 소주(昭州), 계주(桂州), 연주(連州)를 연달아 함락시키고 곧바로 남한의 요충지인 소주(韶州)로 압박해 갔다.

그러나 이번의 패배에 대해 남한왕 유창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안일하게 신하들에게 힘을 돋우는 말을 했다.
「소주, 계주, 연주, 하주는 본래 호남의 땅이었으니 송나라가 탐나면 가져가라고 하세. 이후에는 저들이 더 이상 남쪽으로 쳐들어오지 않을 걸세.」

이 한심한 남한왕 유창이 어떻게 시대의 영웅 조광윤의 포부를 알 수 있겠는가? 유창이 소인배 무리에게 정사를 맡기고 잔인한 형벌을 감행하고 사치하고 음란무도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대해 샅샅이 알고 있는 조광윤은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알고 보니 내가 남한을 정벌하는 것은 실로 이치에 맞는 일이다. 이러한 폭군으로부터 응당 백성을 구해내야 하겠다.」

이 한마디 말에 송군 장수들은 송태조가 몇 개 주현을 뺐는데 그치지 않고 영남(嶺南)의 백성들을 구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남한왕조를 뒤엎으라는 조광윤의 명령을 받들고 남한 정벌에 나선 주장 반미는 더욱 진군의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군을 이끌고 거침없이 소주(韶州)를 공격했다.

소주는 영남의 북쪽 문호이기 때문에 그곳을 잃으면 도성(都城) 광주(廣州)는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다.

송군이 소주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유창은 급히 정예병마를 출동시키고 도통(都統) 이승악(李承渥)을 원수(元帥)로 삼아 소주를 사수하도록 명했다.

병사를 이끌고 소주로 달려온 이승악은 부대를 소주성 북쪽의 연화봉(蓮花峰) 밑에 주둔시키고 송군과 결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송군과 맞서기 위해 이승악은 ‘코끼리군단(象軍)’을 포진했다.

코끼리 등에 긴 창을 가진 병사 10여 명씩 태우고 수백 마리의 코끼리로 전투대형을 이루었는데 그 기세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종래로 이런 ‘코끼리군단’을 본 적이 없는 송나라 병사들은 겁을 집어 먹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송군의 주장인 반미는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장병들에게 강한 석궁〔〕(弩)을 집결시켜 일제히 코끼리대형을 향해 활의 공세를 퍼붓도록 했다.

코끼리가 비록 덩치가 크고 기세가 사나웠지만 육중하고 행동이 느리기 때문에 궁수들은 아주 쉽게 코끼리 등에 타고 있는 병사들을 명중할 수 있었다.

코끼리 떼가 물러나기 시작하자 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화살이 날아가는 족족 코끼리 등에 있던 병사들이 땅에 고꾸라졌다.

송군은 이 기세를 타고 적진으로 돌진해 남한군을 일망타진하고 소주(韶州)를 함락했다.

소주를 함락하자 송군은 거침없이 남하하여 곧바로 남한의 도성 광주를 공격했다. 남한왕 유창은 황급히 명령을 내려 번우성(番禺城)에 구덩이를 파고 수비하도록 했다.

비참하게도 이때 그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는 장수는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궁녀와 왕비들에게 잘 대해 준 덕분에 궁녀 양씨(梁氏)가 유창에게 자신의 양자인 곽숭악(郭崇岳)을 추천해 주었다.

유창은 즉시 곽숭악을 초토사로 임명하고 6만 병사를 통솔해 마경(馬徑)에 주둔하도록 했다. 곽숭악은 비겁하고 지략도 없는 쓸모없는 자로서 오로지 귀신에게 기도하고 보우를 빌 뿐이었다.
 
송군은 승승장구해 영주(英州), 웅주(雄州)를 함락했다. 싸우지도 않고 번우(番禺)로 후퇴해 돌아온 곽숭악은 유창에게 일단 먼저 번우를 고수하고 다시 좋은 방법을 강구해보자고 건의했다.

어찌할 방법이 없게 된 유창은 송군에 사자를 보내 강화할 것을 제의했다.

송군의 주장 반미는 남한의 사자를 만나주지도 않고 단숨에 마경으로 진격해 쌍녀산(雙女山) 밑에 군영을 세웠다. 쌍녀산은 번우성에서 1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송나라 대군을 코앞에 두고 완전히 사기가 꺾인 유창은 배를 준비하도록 명하고 왕비와 궁녀, 금은보화를 싣고 해상으로 도주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 밖에 다른 약빠른 자가 한발 앞서 배를 훔쳐 타고 달아나버렸다. 드디어 막다른 골목에 빠지게 된 유창은 좌복사(左僕射) 소최(蕭漼)를 송군에 보내 항복을 받아 줄 것을 요청했다.

송군의 주장 반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소최를 경성(京城)으로 압송하고 장병을 이끌고 다시 번우성을 공격했다.

유창은 신하들에게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나의 금은보화를 탐내고 있는 것이오. 깡그리 없애버려 텅 빈 성만 갖게 해야지.」

그는 창고에 불을 지르고 몽땅 태워버렸다.

최후로 유창은 남한의 60개 주, 214개 현, 17여만 세대를 헌납하고 투항했다.

963년(태조4) 9월 반미(潘美)와 정덕유(丁德裕)가 남한에 공략을 시작한 날로부터 971년(태조 12) 연초에 이르기까지 7년 4개월에 거쳐 조광윤은 단지 몇 명의 국경을 수비하는 장수들의 힘을 빌려 부패하고 타락한 남한정권을 거침없이 쓸어버리고 송조(宋朝)세력을 남해안까지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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